안갯속의 여행지

by 호접몽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추억 속에서 더욱 멋지게 자리 잡는 곳이 있다. 강력하게 이끌려 그곳으로 향하고, 전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심봤다!" 외치고 싶은 곳이 있다. 우연한 기회에 가보게 되었는데, 계획하고 방문한 곳보다 더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여행지, 나에게는 이탈리아의 비첸차가 그런 곳이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여행을 할 때였다. 충분히 넉넉한 시간을 할애해서 계획을 세웠지만 여행지에서는 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특히 충동적으로 예상에 없던 여행지에 가게 되면, 여행은 더욱 맛깔스러운 기억으로 남는다. 현장감 넘치는 여행은 예상외의 여행지가 채워주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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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나에서 베네치아까지 약 한 시간가량 기차로 이동했다. 베네치아행 기차에서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아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서먹서먹하게 가다가 시간이 조금 흐르자 사진도 찍어주고, 여행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그들 중 한 명이 한국에 방문한 적도 있다는 등 이야기꽃이 피기 시작했다. 대화가 급물살을 탈 즈음, 내려야 할 곳에 도착했다며 부랴부랴 짐을 들고 떠났는데, 그들이 내린 곳이 비첸차였다.



베네치아 체류 일을 생각보다 길게 잡았던 탓에 금세 시큰둥해졌다. 결국 안개가 짙게 낀 날, 베네치아 골목길을 가는 대신 비첸차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미 가볼 만한 곳은 실컷 돌아다닌 탓도 있었고, 무언가 색다른 시도를 하고 싶은 생각도 들던 참이었다. 기차에서 만난 사람들이 비첸차도 가볼 만한 곳이라고, 멋진 곳이라며 손가락을 치켜들던 기억도 떠올리며, 그들의 자부심을 확인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고, 며칠간 골목 구석구석 누비며 돌아다닌 베네치아에 또 가기보다는 하루쯤 다른 기억으로 채우고 싶은 호기심도 발동했다. 게다가 안개까지 짙은 날씨에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 한 번 더 가는 것보다는 다른 곳에 가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온갖 이유를 갖다 붙이며 베네치아 대신 비첸차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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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첸차는 나에게 번외 여행지였다. 일상 탈출의 마음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여행 중에 계획에서 탈출을 시도했다.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은 작은 모험이 되어 신선한 자극이 된다. 비첸차 여행은 계획도 정보도 없었기에 발길 닿는 대로 걸어가 보았다. 말끔하게 정리된 그곳은 계획도시 비첸차의 시작을 알려준다.



비첸차는 바깥에서 보는 것보다 그 안으로 직접 들어가서 보는 것이 훨씬 환상적인 곳이다. 모르면 몰랐지, 알고 나니 그냥 지나쳐 가버리기에는 마냥 아쉽기만 한 곳이었다. 게다가 그날은 안개까지 짙었으니, 안개가 도시의 분위기를 신비롭게 보이게 해주는 재주가 있었다. 마법의 도시에 초대받은 기분으로 도시를 마음에 담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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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첸차는 유명한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 (1508~1580)가 설계한 건축물이 있는 도시다. 중심가에 보존된 팔라디오 양식의 건축물은 1994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고 한다. 고풍스러운 건축물을 보며 이곳은 건축하는 사람들이라면 꼭 가보고 싶은 꿈의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건축한 건물이 하나 둘 세워지며 도시가 만들어지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리라.



비첸차는 제각각 매력을 발산하는 건축물 속에 파묻혀 두리번거리게 되는 곳이다. 앞에 보이는 건축물도, 방금 지나친 건축물도, 360도 회전을 하며 바라보아도, 모두 색다른 멋을 내뿜는다. 비첸차에서는 지도가 필요 없다. 지도를 펼쳐드는 순간, 비첸차를 더 많이 보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지도를 접고 비첸차의 거리에 몸을 내맡기면 비첸차의 거리가 알아서 나를 안내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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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첸차는 소리로 기억되는 여행지다. 나에게 강렬하게 마음에 와닿은 것은 바로 '소리'였다. 그곳은 마음을 울리는 소리의 도시다. 예상치 못했던 소리였기에 온몸이 얼어붙는 듯 전율하게 되었다. 고개를 들어 건물을 바라보다가, 에르베 광장에서 12시를 알리던 종소리에 한참을 넋을 잃고 서있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추었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간이 한 접점에서 만나 모든 것을 정지시켜버린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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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정지 화면이 되어버린 비첸차 골목 여행은 소리가 멈추자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간 듯 다시 시작되었다. 추운 겨울이어서 꽁꽁 얼어버린 몸을 녹이고자 카페에 들어가 뱅쇼 한 잔 마시고 몸을 녹이고 길을 나서니, 이번에는 길거리 악사의 아코디언 연주 소리가 들려왔다. 청중은 동네 개들이다. 검정 개, 누런 개, 얼룩 개 세 마리가 올망졸망 연주를 감상하고 있었다. 눈을 감고 아코디언 연주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위대한 연주가의 솜씨는 아니지만, 내 앞에서 연주하고 있는 그 음악이 나에게는 최고의 연주다. 살아있는 소리요, 나만을 위한 연주이니, 멋진 연주에 주머니 속에 있던 동전으로 화답한다. 에르베 광장에서 들은 종소리에 이어 소리로 기억될 추억 하나 추가한다.



쌀쌀한 겨울 날씨인 것이 내심 아쉬웠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그곳을 도드라지게 멋진 추억으로 남게 했다. 안개는 내가 보고 듣는 것을 환상적으로 재편집을 해주는 마법을 부렸고, 추위는 뱅쇼의 맛을 제대로 느끼게 해주었다.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안개가 살짝 가려주었기에 소리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고, 비첸차를 소리로 기억되는 여행지로 남게 해주었다. 지금도 가만히 눈을 감고 집중하면 귓속에 에르베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하다. 안갯속의 도시 비첸차를 보게 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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