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흐르면서 나의 여행에는 제약이 많아졌다. 예전에는 '에라 모르겠다'라며 충동적으로 여행을 저질러버렸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여행을 결심하기 전에 여행을 가지 말아야 할 수많은 이유가 아른거렸다. 여행의 발목을 잡는 이유가 점점 늘어나면 여행을 가지 않는 걸로 결론짓게 마련이었다.
그렇게 살아가다 보니 사상 초유의 사태가 왔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 팬데믹 시대 말이다. 이제는 여행을 하고 싶어도 갖가지 이유를 대며 참아내야 한다. 아무래도 여행의 기회가 생겼을 때 덥석 잡아야 했다. 후회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지만.
문득 정여울 에세이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이 생각난다. 글과 사진, 그림이 나를 폭넓게 물들여버리며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책에 보면 감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20대에 놓쳐버린 '기회들'보다 20대에 놓쳐버린 '감성'을 이야기하고 싶다. 기회는 노력해서 다시 만들 수 있지만, 감성은 노력만으로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다. 지식은 추구하여 얻을 수 있지만, 감성은 노력보다 그때 그 순간의 우연에 기댈 때가 많다. 게다가 20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감성 중에서도 '설렘' 같은 것은 정말 아무리 애를 써도 인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첫사랑의 설렘을 억지로 조작해낼 수 없듯이, 나이가 들수록 순수한 설렘을 느끼기는 참 어려운 일이다. 무슨 일을 새로 시작해도 대부분 웬만하면 설레게 되어 있는 20대야말로 '설렘'을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는 가장 멋진 시기가 아닐까.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33쪽
여행을 좋아하던 예전의 나를 돌이켜보면, 감성만큼은 지금보다 나았던 듯하다. 좀 더 설레고, 좀 더 감탄하며, 새로운 것을 경이롭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적어도 지금처럼 만사 귀찮아하면서 '했다 치고'의 감성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전의 나는 책을 덮고 세상을 여행하라고 하지만, 지금의 나는 세상사 거기서 거기라며 여행보다는 책을 읽고 싶어 한다. 어떤 것이 정답은 아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외적 요소도 있는 것이다. 그냥 상황에 맞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 아니겠는가.
아쉬운 것이 있다면 여행지를 바라보는 감성이다. 시간이 흐르면 지금보다 더 녹슬어있겠지. 감탄을 잊고 '괜히 왔다'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오거나, 아예 여행을 시도조차 하지 않는 순간도 생기겠지. 평범하고 사소한 것의 소중함을 부여잡고 놓치지 않아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평범한 사물들이 빚어내는 행복의 오케스트라
어느 날 길을 걷다가 발견한 사소한 사물이 커다란 행복을 느끼게 해 줄 때가 있다.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며 '아주 대단하고 멋진 장면을 찍어야지' 마음을 먹고 있다가, 하루는 저렇게 빨랫줄에 걸린 빨래를 발견하고 문득 걸음을 멈춘 적이 있다. 평범한 사물들이 이토록 애틋한 느낌을 자아낼 줄이야. 문득 평범하고 사소한 것들을 보면 눈물겨울 때가 있다. 아름답고 대단한 것들만 찾아다니다가, 평범한 사물들에게서 뜻하지 않은 감동을 받을 때다. 저렇게 단정하게 빨래를 널어놓은 집주인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아, 남들도 나와 비슷한 빨랫감을 널어놓고 사는구나' 하며 신기해하기도 한다. 그럴 때 느끼는 감정은 내가 이미 누리고 있는 이 삶에 대한 가없는 감사다. 그것이야말로 행복의 제1조건이 아닐까.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110쪽
오늘은 감성 돋는 시간을 보내야겠다. 카메라를 꺼내 들고, 대단한 무언가를 찍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훌쩍 자라 있는 풀 한 포기를 찍거나 어느덧 익어버린 감귤을 담아보아야겠다. 사진은 그저 사물을 찍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을 담는 것이다. 사소한 것에 감탄하는 감성을 잊는다면 여행을 해서 무엇하겠는가. 여행에 필요한 그 '감성'을 잊지 말자고 오랜만에 산책을 나서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