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하는 사람마다 기억이 다르다. 누군가는 그곳에서 '동화'를 이야기하지만, 막상 그곳에 가보니 도무지 어떤 부분에서 '동화'를 떠올려야 하는지 알 수 없던 경우도 있다. 누군가는 그곳이 최악이라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안 가면 후회할 만한 곳이기도 했다. 그렇게 사람마다 여행지에 대한 기억은 다르다.
같은 곳을 여행해도 때에 따라 감상이 다르다. 어느 시기에 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오늘 본 것과 다음 날 본 것이 정반대의 느낌을 주기도 한다. 예측 불가능한 반전이 여행만의 매력이다. 몸 컨디션에 따라서도 많은 부분이 달라진다. 지쳐서 마냥 쉬고 싶을 때에 여행 스케줄이 남아서 억지로 다니는 여행은 기억에서 금세 사라진다.
그리고 여행의 속도 또한 여행지에 대한 내 반응을 다르게 한다. 너무 느려도, 지나치게 빨라도 안 된다. 예전에는 여행은 어슬렁어슬렁, 느릿느릿, 비둘기 걸음으로 천천히 하는 여행만을 선호했다. 새벽부터 강행군했던 여행은 그곳에 다녀왔다는 것 말고는 기억에서 희미해져 거의 사라져 버리는 데다가 무척 힘들었던 기억만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대 이해하지 못했던 그 방식의 여행을 조금은 이해하게 된 계기가 『여행의 속도』라는 책 속의 글이었다. 이왕 가는 여행, 조금은 더 속도를 내며 보다 많은 곳을 밟아보는 심리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고속 열차는 청춘의 뜨거운 피다. 짧은 시간 안에 꿈에 닿기 위해 전력으로 내달리는 질주본능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청춘을 붙잡고 싶은 중년의 집착일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중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얼마나 많은 꿈들이 실현되지 못하고 사라져 갔는지 깨닫는다. 돌이켜 보면 가보고 싶었던 곳들 중 반도 가보지 못하고 세월은 덧없이 흘러갔다. 하늘이 내게 얼마만큼의 시간을 더 허락할지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중년의 여행은 청춘의 그것처럼 느긋할 수 없다. 일반열차에 앉아 지루한 시간을 참아낼 마음의 여유가 없다. 유한한 시간 안에 목적지에 도달해야 한다. 하루라도 빨리 일생의 꿈을 실현해야 한다.
『여행의 속도』 34쪽
이 책은 사유하는 건축학자 리칭즈가 들려주는 여행과 인생 이야기이다. 책 제목인 '여행의 속도'에 맞춰 총 일곱 파트로 글을 나누고 있다. 250-350km/hr의 고속열차부터 0km/hr의 고요한 묘지 여행까지, 빠른 속도로부터 점점 느리게 여행지를 안내해준다. 이 책의 순서에 따라 읽어 나가다 보면 직접 여행에 참여하는 듯 긴박한 속도감을 느낀다.
'여행의 속도'를 생각해보니, 지금껏 내가 여행에서 놓친 부분에 대해 깨닫는다. 때로는 긴장감을 느끼며 몰아치는 휘모리 장단 같은 여행도 포함되어야 여행에 생기가 있다는 것 말이다. 예전에는 몰랐다. 인생이라는 시간은 한정되어있다는 그 당연한 사실을 실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세네카'의 말이 마음에 콕 와 박힌다.
인간은 항상 시간이 모자란다고 불평을 하면서
마치 시간이 무한정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_세네카
다시 여행을 한다면, 느릿느릿 천천히 여행지를 온몸으로 느끼는 시간도 누리고, 후다닥 핵심만 바라보고 보다 많은 곳을 방문해보는 여행 모두, 일정 내에 담아보아야겠다. 누가 추천해주는 여행은 참고하되, 나만의 속도조절을 하면서 여행을 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정말 가볼 만한 곳이 많고, 느낄 점도 충분히 많다. 이제는 그 많은 것들을 누릴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고 안목도 예전보다는 더 생긴 것 같은데, 여행의 기회는 좀처럼 잡을 수가 없다. 어서 좋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려본다. 지금은 그저 여행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