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버닝을 보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창동의 <버닝>이 불명확하거나 불친절하다고 말한다. 영화의 스토리라인은 단 한숨에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명료하지만 결말은 결국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게 <버닝>은 오히려 보여주고 싶은 것과 보여주기 싫은 것의 구분이 확실한 영화다. 버닝이 제시하는 명확한 문제의식은 ‘헷갈림’ 그 자체에 있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며 어쩔 땐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그런 자신이 불편하다. 그렇게 헷갈림 속에 질식할 것 같다. 그 자체를 보여주었기에 나는 이 영화가 불편했지만 그 문제의식 자체가 불명확하거나 불친절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세 번. 이 영화를 본 횟수다. 너무 좋아서라기보단 너무 헷갈려서 그랬다는 게 맞을 것이다. 헷갈리는 순간의 연속이 곧 우리의 ‘매일’이기에 나는 명료하지 않은 모든 것들 틈으로 답을 찾고자 했다.
*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돼"
<버닝>이 불친절해 보이는 것은 보는 이에게 중요한 것들에 대한 답을 주지 않아서이다. 시청자는 계속해서 저게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있다면 그게 무슨 의미인 것인지, 없다면 무슨 소용인지 궁금하다 못해 지치게 만든다. 주인공들은 존재의 여부조차 모르는 것들을 규명하려 한다. 필사적으로.
가령 해미는 ‘그레이트 헝거(Great Hunger)’를 찾기 위해 아프리카로 떠난다. 단순한 배고픔을 뜻하는 ‘리틀 헝거(Little Hunger)’가 아니라 삶의 의미에 굶주린 그레이트 헝거를 찾는 것이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하다. 카드빚에 시달리면서 가끔 상가 앞에서 춤을 추는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그는 돈을 모아 아프리카를 간다. 떠나기 전 종수에게 이 사실을 말하는 해미의 눈빛은 설렘이 가득하다. 철없어 보이는 해미는 아프리카를 갔다 와서도 벤과 그의 친구들 앞에서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추며 진심으로 기뻐 보인다. 정말 그레이트 헝거를 찾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해미는 거짓말 덩어리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물에 대해서도 해미는 거짓말을 한 것처럼 보인다. 해미는 종수에게 자신이 어렸을 때 우물에 빠졌는데, 그때 자신을 발견해준 종수를 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종수가 그 얘기를 듣고 멍하니 있자 너는 기억도 못 하냐며 다그친다. 해미가 없어진 뒤 종수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 우물의 존재를 묻고 다닌다. 마을 이장님도, 해미의 엄마와 언니도 그런 우물은 없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16년 만에 만난 엄마는 마른 우물이 분명히 있었다고 한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지. 왜 누구는 있다고 하고 누구는 없다고 하는지. 사실 엄마와 해미보다는 이장님과 해미의 가족이 우물의 여부를 더 잘 알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은 든다. 그래도 해미의 말처럼 그 우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없어지지 않는다.
종수는 우물의 존재 여부와 더불어 비닐하우스를 필사적으로 찾아다닌다. 벤이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고 해미가 사라지자 종수는 안개 낀 시골길을 뛰어다니며 마을의 비닐하우스를 매일 아침 확인한다. 영화 시간이 한 시간 남았을 때부터 마지막 장면 전까지는 사실 종수가 해미를 찾아다니는 것 외에는 딱히 그렇다 할 내용이 없다. 왜 긴장되는지도 모르겠지만 긴장되는 순간의 연속, 불안하고 불규칙한 음악의 선율, 소득 없는 뜀박질과 미행들이 전부다.
영화는 그레이트 헝거, 우물 그리고 비닐하우스에 대한 답을 주지 않는다. 영화 후반부까지 보이지 않던 해미의 고양이에 대해서도 그래 보인다. 그전까지 종수는 모든 것이 헷갈렸다. 자취방 구석에 고양이 싼 똥만이 고양이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일 때 ‘고양이가 있을 리가 없다’던 주인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종수와 영화를 보는 이는 혼란스럽다. 다른 모든 것들도 그렇다. 해미의 말만 머리를 맴돌 뿐이다.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화 후반부에 고양이가 존재하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며칠 밥을 주러 와도 보이지 않던 ‘보일이’는 벤의 집에서 발견된다. 해미는 사라졌고 해미의 고양이만 벤이 데리고 있다. 모든 것이 명확해지는 순간이다. 다소 비약적일 수 있지만 나는 이 고양이의 존재가 앞서 헷갈렸던 모든 것들에 대한 답도 어느 정도 주었다고 생각한다.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른 것들을 향해 달려가던 해미와 종수의 모습이 더 이상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레이트 헝거, 귤, 우물의 존재 여부는 사실 이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 다만 우리 삶 자체가 불확실한 것들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과정 자체이며 답을 찾든 말든 이게 삶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 모든 것 중 하나에 대한 답이 하나를 가리키고 있다면 우리는 또 답을 찾으려고 할 것이다. 그게 얼마나 부질없건 간에. 해미의 자취방에 남산이 반사한 실낱같은 빛을 기억하며…….
개츠비와 비닐하우스
영화는 불편하고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벤과 종수의 대비를 계속해서 보여준다. 붕붕거리며 해미를 데려가는 벤의 포르쉐 뒤로 쓸쓸하게 서 있는 종수의 고물 트럭. 값싼 안주를 파는 포차에서 술값을 낸 뒤 영수증을 오랫동안 쳐다보는 종수의 궁핍함과 곱창집에서 누구도 모르게 카드를 꺼내 결제하는 벤의 여유로움. 대마를 피고 피식 웃어 보이는 벤과 작은 모금에도 콜록콜록 대며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이 터져버린 종수. 조용한 반포와 대북방송으로 시끄러운 파주. 영화 전반에 걸친 벤과 종수의 대비는 종수를 안타깝고 비참한 존재로 그린다.
이 모든 것들이 섹스와 마약 장면만큼이나 적나라하지만 그중에서도 벤과 종수의 차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당연 마지막 장면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종수의 범죄는 너무나도 허술하고 추악하게 그려진다. 그래서 더 역겹고 적나라하다. 반면 그전까지 그려진 벤의 범죄는 치밀하고 깨끗하다. 사실 그를 비난할 수 있는 명확한 근거조차 제시하기 힘들다. 하지만 둘 중 누구의 행위가 정말 역겨운 지는 생각해볼만하다.
종수는 “한국에는 개츠비들이 너무 많다”고 말하는 반면 벤은 “쓸모없는 비닐하우스”가 많다고 설명한다. 이 둘의 주장이 모두 사실이고, 우리가 한반도를 하늘 위에서 지켜볼 수 있는 제삼자가 된다면 우리는 더 적나라한 대비들을 지켜보다 질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에서 벤은 종수를 만나지 못하고 종수 또한 벤을 만나지 못한다. 종수와 벤이 아닌 이들이라고 그 둘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종수가 일용직을 구하기 위해 화물 창고에 있을 때 벤은 반포에서 파스타를 만들 듯 우리는 모두 분리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버닝이 불편한 이유는 종수와 벤의 만남을 통해 개츠비들과 비닐하우스들의 분리된 삶을 이어주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종이컵 속 가래, 빨간 콘돔, 대마 꽁초
버닝이 일상을 묘사하는 방식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사실적이어서 오히려 부담스럽다. 담배, 섹스, 노출, 마약 등 단어를 듣기만 해도 거부감이 드는 것들이 이룬 그들의 ‘일상’은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종수와 해미가 성인이 되어 처음 만나 담배를 피우며 종이컵에 늘어지게 가래를 늘어지게 뱉는 모습, 술집에서 해미의 목 늘어난 티셔츠, 침대 밑 빨간 콘돔.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영화에 출연하는 거부감이 없었냐는 질문에 전종서는 이렇게 말했다.
“그걸 문제라고 하고 부담감이 있냐고 하면 문제가 되겠지만 누구나 담배를 피우고 누구나 섹스를 하고.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건데 그것이 빠지는 건 아니지 않나. (생략) 우리가 사는 거니까.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그냥 사람 사는 모습, 내 모습이 아니라면 지금 어딘가에 있을 누군가의 모습이다. 굳이 대화를 할 때 가래를 뱉거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섹스 장면을 넣을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그게 더 사람 사는 모습이지 않은가.
청년들의 소설
이 모든 이야기가 종수가 남산이 보이는 자취방에서 쓰는 소설이라는 해석도 있다. 모든 것이 ‘미스테리’인 세상에서 종수는 자신의 답을 찾아가는 중이고, 남산을 보며 자위를 하듯 주변의 일을 소설로 담아냄으로써 소설로 자신을 위로하는 것이라는 해석이다. 불확실성이니, 불평등이니, 현실의 적나라함이니 이런 복잡한 요소들을 제외하는 가장 솔직한 문학적 해석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데도 이러한 해석이 전자의 모든 해석을 품을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이라고 생각이 드는 건 내가 복잡함을 회피하려는 사람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소설의 결론은 내가 쓸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사는 청년이기 때문일까.
* 2018 한대신문 문예상 비평 부문 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