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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나라 Feb 23. 2022

이따금 우리를 멈춰 서게 만드는 장면들

이규태 개인전 <순간의 기억>

애니메이션 감독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이규태 작가의 개인전에 다녀왔다. 전시 제목은 <순간의 기억 The Memory of a Moment>. 지난해 12월 22일에 시작했고 이번 달 26일에 끝난다. 원래 20일까지였으나 일주일 연장됐다. 다행히 막차 타듯 다녀올 수 있었다.


http://albusgallery.com/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인스타그램에 꽤 자주 그림을 올리는 까닭에 접할 기회는 많았지만, 그림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와…’ 조용한 탄성이 절로 나오게 만드는 그림들. 마음이 편안해지는 밝은 색감과 안정감 있는 구도. 이렇게만 설명하면 단순한 그림 같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질문이 쏟아진다. 햇빛이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걸 어떻게 이렇게 표현한 거지? 모든 걸 밝게 칠했는데도 왜 사람 형태만은 선명하게 보이는 거지? 자세히 보면 까만 펜 선이 꽤 투박한데 그림 전체는 어떻게 이렇게 정교해 보이는 거지? 그림을 조금이라도 그려보면 안다. 형태가 선명하게 보이려면 어두운 색을 많이 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규태 작가는 밝은 계열의 색연필과 검은색 펜만을 가지고 작업한다. 제한된 재료로 빛과 어둠, 형태를 표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느끼는 편안함 뒤에는 남들보다 더 치열하게 기법을 고민하고, 작은 디테일을 살리기 위한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Kokooma_


알부스 갤러리


전시는 용산구 한남동에 있는 알부스 갤러리에서 열렸다. 고메이 494 건너편에서 한남초등학교를 끼고 올라가면 나오는 흰 건물이다. ‘알부스’는 라틴어로 ‘희다’는 뜻이라고 한다. 작고 단순한 구조지만,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갈 때 창문으로 자연광이 쨍하고 들어오는 게 참 좋았다. 지하 공간도 작은 외부 공간이 있어 포근한 느낌을 준다. 작은 작품들도 자기 매력을 보여줄 수 있는 색과 구조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국내 최초 일러스트레이션 전문 갤러리라고 한다. 트렌디한 곳이다.


전시 1층. 오른쪽 그림은 <걸어도 걸어도>

처음 본 그림은 ‘걸어도 걸어도’ 표지 작업. 내 방문에 이 그림이 담긴 포스터를 붙여두어서 꽤 오랫동안 이 그림을 봐왔다. 그런데 놀랐다. 똑같은데 작아서. 손바닥과 비슷한 크기의 스케치북의 3분의 2 정도를 차지하는 그림. 이렇게 작은 그림인지 몰랐다. 2017년 즈음부터 작가님 그림을 꾸준히 인스타그램을 통해 봤으니까 익숙한 그림들이 많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작아서 신기했다. 핸드폰 화면으로 보는 그림은 원화가 작든 크든 같은 사이즈로 보이니까, 그림 크기가 궁금했던 적이 없었다. 2019년 캘린더를 샀을 때는 당연히 원화가 그 정도 사이즈(B3?) 일 줄 알았다. 이렇게 작은데 이렇게 많은 디테일이 살아있다니! 힘 조절을 어떻게 한 거지. 신기해서 한동안 들여다봤다. 자세히 봐도 거친 선이 거의 없다. 몽글몽글. 이규태 작가의 그림이 3D가 돼서 만질 수 있다면 솜사탕처럼 밀도가 낮고 가벼울 거 같다. 부들부들. 분명 아주 부드러울 거다. 함부로 만지면 녹을 것 같다. 섬세한 사람만이 이런 느낌이 드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겠지.


이규태 작가는 아름다운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해,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보여주는 재주가 있다. 그건 아마 모든 훌륭한 작가들의 재주일 것이다. 그가 포착한 ‘순간의 기억’에는 늘 공간이 있다. 사람이 자주 등장하기는 하지만 공간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게 놓여 있다. 전시 안내문에서도 나오는 ‘공간의 시각화’를 풀어쓰자면 이런 거 아닐까. 공간을 기억하는 일과, 그런 기억을 시각화하는 것.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을 통해 기억을 재현한다. 작가는 그런 작업을 좀 더 치밀하게, 즐겁게 그리고 꾸준히 해내는 사람이 아닐까?


지하 1층에서는 애니메이션 작품 <Here Winter>도 볼 수 있다. 갖가지 어려움 속에서 그녀를 도와주는 사람들. 그러나 그들을 잃고 마는 그녀. 상실감에 꼭두각시가 되어 무대에 선다. 쓸쓸한 꿈에서 깨어나 그녀는 옆에 있는 사람을 꼭 안는다. 단순한 그림체와 스토리지만 걸음을 멈추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물과 파도를 표현한 방법에 정말 많은 내공이 느껴진다. 알고 보니 이걸 다 수작업으로 했다고… 1초당 몇 프레임일까? 10 프레임 넘을 거 같은데. 예술도 결국 노동이고, 가장 신성한 노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중 애니메이션은 정말 깊은 생각과 막노동, 치밀한 계획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는 작품이니까, 종사자분들을 존경하게 된다.


전시장 지하 1층. 아이패드로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다.


작가는 늘 도전하는 사람이다. 이규태 작가는 이번 전시를 위해 큰 규모의 원화 작품에 도전했다. 가장 큰 작품은 56 X 83cm. 화폭이 커지면 중간중간에 거칠어질 만도 한데 디테일이 필요한 부분은 놓치지 않고 집중한 흔적이 보인다. 빛이 좀 더 선명하게 보이는 장점도 있다. 작가는 “상상의 범주 밖의 것을 목격했을 때”를 소재로 삼고 그런 장면을 “조금 더 극대화시켜서” 그림을 그린다고 했는데, 확실히 큰 작품에서는 빛을 통해 이루려는 극대화 효과가 더 잘 보인다. (몇몇 큰 작품이 스케치북에 그린 작은 그림보다 가격이 저렴해서 집에 데려가야 하나 고민했지만 백수는 울면서 지갑을 닫습니다..)


규모가 큰 원화들


‘성공한’ 일러스트레이터. ‘이상적인’ 일러스트레이터의 삶. 이런 수식어가 붙으려면 기업과의 콜라보는 필수나 다름없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그해 우리는>에서 나온 고오 작가 역을 봤을 때 이규태 작가가 떠올랐다. 기존의 작업 방식을 위협받지 않으면서도 생계를 이어가고,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는 콜라보 기회들. 물론 이규태 작가에게도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더 넓은 팬층을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음은 분명하다. 애플, 구찌, 벤츠, 스타벅스, BTS… 누구든 이름만 들어도 아는 대규모 명품 기업과 함께 한 작업들을 보는 재미도 있다. 이거보다는 비교할 수 없이 훨씬 작은 작업이지만 그림을 의뢰해보기도 하고, 의뢰받아보기도 한 나는 ‘협업’이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안다. 기업은 원하는 게 있고 작가는 그것들을 다 들어주다가는 허리가 휘고 자기 스타일을 잃게 된다. 반대로 작가가 너무 힘이 세도 일이 안된다. 누구에게나 직감적으로 와닿는 결과물을 만들려면 의뢰자도, 의뢰받은 자도 자기 작업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양쪽 다 부럽다..)


차례대로 스타벅스, 레노버, 헤네시 콜라보



나는 이규태 작가의 그림을 좀 더 이해하게 됐을까? 그림자를 표현할 때 검은색이나 회색이 아니라 보라색을 이용하고, 빛에 초록색 하늘색을 섞어 쓰는 건 알게 됐다. 경계가 보이지 않도록 같은 색을 쓰더라도 아주 미세하게 힘을 주어 명암을 표현한다. 몰스킨 스케치북과 12개의 색연필을 사용한다. 하지만 그림은 머리로 이해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이걸 알았다고 해서 내 그림이 이 작가의 그림을 닮을 리 없다.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그가 어떻게 그림을 그리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저 조금 더 가까워지길 바랄 뿐. 어쨌든 그림을 더 그리고 싶어 졌으니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사실 전시가 열리기 전부터 작가님 인스타그램을 통해 소식을 들어서 일찌감치 예약을 했었다(전시는 네이버로 사전예약을 해야만   있다). 그런데 막상 예약한 날에 무슨 일이 생겼다.  차례 미뤘다가 바빠져서   차례 취소하고, 그러다가 이제 진짜  보겠다 싶어 그날은 무슨 일이 생겨도 간다는 마음으로 다시 예약! 드디어 오게 됐다. 오늘 전시를 보고 나니 미룬  후회된다.   분들은 기간이 얼마  남았지만  다녀오시기를당일에 취소표가   생긴다.


https://m.booking.naver.com/booking/12/bizes/627581/items/4218320?area=plt&theme=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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