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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립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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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나라 Jun 09. 2020

현관 앞 박스들

#1 독립은 박스와 마주하는 일

독립에 필요한 것이 한 두 개가 아니다. 집에서 온갖 살림을 다 들고 와서 수월한 편에 속하는 나에게도 그렇다. 그러니까 얼마나 수월하냐면 이미 - 침대, 식탁, 1인용 소파, 작은 서랍장, 대형 거울 - 이렇게 사실상 필요한 것부터 필요 없는 것까지 기회를 노려 집에서 몽땅 가져왔다.


집에서 가져온 가구


그래도 필요한 물건은 넘쳤다. 그냥 원래 집에 있어야 하는 것들, 그래서 그냥 거기에 계속 있거나 리필되는 것들. 그런 것들이 독립하면 없다. 다 누군가에 의해 채워진다는 사실을 매일 저녁 소셜커머스 어플을 켜고 있는 나를 보며 깨닫는다. 퇴근하고 와서 집을 정리하고, 오늘 온 택배를 개봉하고, 당장 또 필요한 것들을 사면 하루가 끝난다. 피곤한 과정이다.


너무 복잡하게 사는 것일까? 그래서 남들에 비해 필요한 것이 더 많은 것일까? 잡동사니를 7평짜리 작은 오피스텔에 두 박스나 가져온 사람이기는 하다. 사실 가져온 짐들도 삼분의 일은 버리고, 삼분의 일은 본가에 놔두고, 삼분의 일만 가져온 것이다. 미니멀리즘을 실천할 거라 이것만 들고 온 거라고 우겼더니 애인은 너는 미니멀리즘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사람이라고 한다. (공기놀이, 마스킹 테이프, 인형 여섯 마리도 기어이 가져왔기 때문일까...)

내 잡동사니들


어느 정도는 인정한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짐도 많지만 무언가를 구매할 때도 모든 게 까다로운 편이다. 쓰레기통도 흔한 5천 원짜리 말고 무소음에 냄새 차단되는 가성비 쓰레기통을 꼭 찾아야 한다. 커튼도 암막 커튼이지만 너무 칙칙하지는 않은 것을 찾느라 주문까지 꼬박 3주가 걸렸다. 심플하지만 화려하게, 모던하면서 클래식하게. 디자이너들이 싫어하는 그대로를 원하는 사람이 나다.


하지만 이런 까다로움과 복잡스러움을 차치하더라도, 꼭 필요하고 계속 써왔지만 그전까지는 내 돈으로 사거나 그 유무를 챙기지 않았던 것들에 이제는 내 시간을 들여야 하는 것은 확실하다. 뚫어뻥이나 쓰레기봉투, 야채와 과일, 커튼 링, 샤워기 헤드, 옷걸이, 생수 이런 것들이다. 별로 신경도 안 쓰였던 것들이 없으니 “나 여기 없어요!!!” 소리치면서 날 불편하게 한다.


전에 부모님과 살고 있는 친구가 자취하는 자기 애인한테 왜 혼자 사는데 생활비가 100만 원이나 드냐며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위의 것들 중에 가성비를 잘 따져서 사면 크게 돈이 들지 않고, 매달 지출되지 않는 것들도 많다. 하지만 매주 혹은 매달 고정적으로 돌아가면서 소진되거나 말썽이기 때문에 결국 아끼려 해도 도루묵이 되는 것 같다. 이번 달은 샴푸를 샀으니까 앞으로는 샴푸 값이 굳어서 2, 3번째 달은 생활비가 줄겠다고 생각하지만 그 사이에는 샤워기 헤드가 고장 나고, 다 쓴 쓰레기봉투 따위를 채워 넣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도 내 현관 앞에는 일주일에 2-3번 꼴로 택배가 쌓인다. 본가에서도 많이 사면 그 정도였지만 이제는 내용물이 다르다. 사치품이 아니라 하루는 수압이 좋고 튼튼한 샤워기 헤드, 하루는 편의점보다 저렴하게 구입한 삼다수 2L 6개짜리 3세트 따위다. 부족한 것들의 빈자리는 더 크게 다가오고 그것들을 채워 넣기 위해서는 돈과 시간이 든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 저녁에 집에 오면 나보다 먼저 와서 덩그렁이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박스들. 그리고 이 안에 있는 모든 비닐을 뜯어내는 일. (아, 이것들을 처리하는 것은 또 다른 얘기라 다음화에 다루고자 한다.) 어쨌든 독립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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