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콘도 씹고 영화도 씹자
팝콘무비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팝콘 씹으면서 볼 수 있는 오락성의 영화를 말한다. 쓸데없이 심오하고 보고 나면 머리 아프고 인터넷 켜서 해석 찾아봐야 하는 영화 말고 두 시간 동안 신나게 보고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잊어버릴 수 있는 재밌는 영화. 이것이 팝콘 무비다. 그리고 나는 팝콘 무비를 정말 좋아하는데 생각보다 목적과 기능에 충실한 팝콘무비를 찾기가 쉽지 않다.
스펙터클에 익숙한 현대 관객인 나는 때려 부수기만 한다고 신나 하지 않는다. 적당히 간지 나는 액션, 적당히 화려한 스케일, 적당히 멋진 캐릭터, 적당히 납득 가능한 내러티브, 적당히 세련된 연출 그리고 적당한 주제의식 -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뒤끝 없는 즐거움만을 남긴다면 잘 만들어진 팝콘무비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적당한 게 제일 어려운 거다.
내가 생각하는 완벽한 팝콘 무비 리스트는 대충 이렇다. <아이언맨1>, <캡틴아메리카:윈터솔져>, <엣지 오브 투모로우>, <스타트렉:비욘드>, <스파이더맨:뉴 유니버스>, <포드 대 페라리>, <마션>, <미션임파서블:로그네이션>, <레고무비1>… 적다 보니 사실 이 영화들은 적당하지 않다. 적당하다기엔 매우 잘 만들었고 극장 문 나서면서 까먹기는커녕 소 되새김질하듯 곱씹었던 영화들도 있다. 하지만 그건 내 천성이 과몰입 오타쿠이기 때문일지도... 갑자기 완벽한 팝콘무비의 정의에 혼란이 온다. 잘 만든 영화 중에 숨 안 막히고 팝콘 씹을 수 있는 분위기를 지닌 영화라고 말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건 이상향의 팝콘무비를 만나기 위해 한 달간 골랐던 영화들에 대한 기록이다. 오로지 오락성을 기준으로 별 다섯 개 만점 기준.
고질라 vs 콩 정말 직관적인 제목이다. 정말로 이 영화는 고질라랑 콩이 싸우는 게 내용의 다다. 하지만 나는 괴수물을 좋아하므로 컨셉에 충실한 내용에 만족했다. 고층빌딩만 한 괴물들이 싸우고 있는데 태연히 창가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콩에 비해 너무나 짧은 고질라의 암리치가 다소 신경 쓰였지만. ★★★
인투 더 스톰 팝콘 무비를 고를 때 기준 중 하나는 관심 있는 배우가 나오느냐 마느냐이다. 그 기준에 따라 리처드 아미티지를 보고 고른 영화인데 저기능 AI가 재난 영화를 100편쯤 수집한 다음에 클리셰를 뽑아서 쓴듯한 진부한 각본과 진부한 연출을 보여 준다. 선택의 이유였던 리처드 아미티지가 그다지 핫하게 나오지도 않는다. ★★
드래프트 데이 미국의 국민 스포츠 미식축구의 드래프트 데이를 소재로 한 영화다. 미식축구를 잘 몰라도, 드래프트가 뭔지 몰라도 영화에서 친절히 설명해주니 걱정 없이 봐도 된다. 밝은 스포츠 영화 톤에 맞는 적당한 속도감의 연출과 깔끔한 내러티브로 산뜻한 재미를 선사한다. 그렇다고 <머니볼>을 기대해선 안 되지만. 케빈 코스트너가 할아버지치곤 핫하지만 한참 어린 제니퍼 가너와 엮이는 그림이 다소 불쾌할 수 있다. ★★★
분노의 질주:홉스 앤 쇼 분노의 질주 시리즈는 오락영화를 보고 싶을 때마다 한 편씩 도전하지만 항상 실패하는 필패의 시리즈다. 닉값하는 카체이스 씬이 볼만하고 바네사 커비와 이드리스 엘바가 아주 섹시하게 나오지만 두 주인공 캐릭터와 개그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말 많은 근육빡빡이에게 페티시가 있다면 추천★★
패신저스 SF 장르를 좋아하고 호감 배우인 제니퍼 로렌스가 나옴에도 불구하고 개봉 당시 평이 너무 좋지 않아 걸렀던 영화인데 죽을 때까지 걸렀어야 했다. 찌질한 백인남자에게 영웅서사를 부여하고 스톡홀름 신드롬에 걸린 여자의 감정을 얼렁뚱땅 로맨스로 버무리는 정신 나간 영화. 이 영화 만들 돈으로 차라리 캘리포니아 산맥에 나무를 심었다면 인류에 도움이 되었을 것.★
저스티스 리그:스나이더 컷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수렁에서 건진 내 아들 버전의 저스티스 리그. 잭 스나이더가 제작 도중 하차하고 조스 웨던이 이어받아 말아먹은 그 2017년판 저스티스 리그를 재편집한 작품이다. 무보수로 일해서 되살린 만큼 캐릭터들에 대한 잭 스나이더의 애정이 듬뿍 느껴지며 오타쿠들이 환장하는 캐릭터 간 관계성을 기준으로 본다면 꽤나 수작. 하지만 그의 고질병인 구멍 뚫린 플롯과 지나친 슬로모션을 역시나 여기서도 견뎌야 한다. 4시간이라는 러닝 타임의 압박이 있지만 챕터 별로 진행되기 때문에 드라마 보듯이 나눠서 봐도 무방하다. 워너 브라더스의 다채로운 삽질로 나가리 된 스나이더버스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묘한 센티멘털도 느낄 수 있다. ★★★☆
클로버필드 10번지 밀실 스릴러+디스토피아+SF라는 나의 취향 저격 요소들을 때려 부어 만든 만족스러운 코스 요리. 완벽한 팝콘 무비를 찾아 떠난 여정에서 건진 보석이다.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을수록 재밌게 볼 수 있을 것 ★★★★☆
코시국과 치솟은 티켓값의 콜라보로 극장을 가는 횟수가 현저히 줄었다. 집에서는 집중이 쉽지 않다 보니 팝콘을 씹기 위한 영화 시청과 영화를 위한 영화 시청의 비율이 대략 6:4 정도가 되었다. 나의 팝콘 취향이 까다로운 것일까? 백퍼센트의 팝콘 무비를 찾는 과정은 언제나 쉽지 않다. 어째 팝콘 씹으려다가 덜 익은 강냉이에 이빨 깨지는 기분을 느낄 때가 더 많았지만 7편 보고 1편 정도 건진다면 나쁘지 않은 스코어다. 다음 달엔 2편 정도를 건질 수 있길 바라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