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에 대한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어릴 적 치매를 앓는 할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그때의 경험 때문인지 내 머릿속에서 노년이란 병듦의 동의어로 박혀 있다. 할머니와 정서적 교류가 그다지 없었던 나에게 할머니는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집으로 들어온 병든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할머니는 내가 처음으로 함께한 노인이었고, 처음으로 지켜본 노년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할머니는 추억보다는 죽음에 대한 어떤 메타포로 기억된다. 노년과 늙고 병든 육신에 대한 메타포로.
해가 지나면서 할머니는 점점 정신이 온전할 때보다 아닐 때가 늘어났고 집안을 맴도는 냉랭한 기운도 늘어났다. 할머니와 함께했던 시절을 기억하면 떠오르는 것은 할머니의 얼굴보다는 내 부모의 어두운 낯빛이다. 부모님도 당신의 부모의 노년을 처음 겪어보는 것이니 아마 그 모든 과정이 힘들고 서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때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짐작 가능한 어른들의 사정과 말다툼이 간간이 있었고 결국 할머니는 요양원으로 모셔졌다. 그렇게 나에게 할머니는 일 년에 한두 번 보는 사람이 되었고 성인이 되고 난 뒤로는 몇 년에 한 번씩 보는 사람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모습은 당신의 딸과 손녀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던 할머니의 맑은 눈빛이다. 할머니는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낯을 가리는 아이처럼 수줍게 웃으면서 우리를 바라봤다. 그 만남을 마지막으로 얼마 후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장례식을 모두 치른 후 엄마는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놨다. 할머니가 생전 얼마나 힘들게 아픈 남편을 돌보며 자식들을 키워 냈는지, 얼마나 대단하고 총명했던 사람인지.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고 상상만 할 수 있는 할머니의 ‘진짜’ 모습에 대해.
종종 노년이 되어 죽음을 준비하는 것에 대해 상상해 본다. 나에게 가장 끔찍한 죽음이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죽음이기에 준비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다. 삶에 있어서 탄생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지만 적어도 죽음만큼은 내가 결정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아마 노년에 대한 두려움은 내가 나로서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상태에서 죽음을 기다려야 한다는 무력함에서 기인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존엄사 신청자 중 80%는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결정을 철회한다고 한다. 결국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삶에 대한 미련이 무력감보다 큰 것일까? 어쩌면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채로 맞이하는 죽음이 축복인 걸까? 삶의 끝을 생각하며 갓난아이처럼 맑았던 할머니의 눈을 떠올려 본다. 병든 몸도, 정신도, 다가오는 죽음도, 그리고 일생의 기억도 잊은 듯한 맑은 눈빛을. 그 무지의 상태가 할머니에게 축복이었는지 저주였는지, 지금의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