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년 간의 제 이야기 열차에 함께 탑승하실 승객분들을 모십니다.
20대 여성의 급성백혈병 투병기를 바탕으로 한 글입니다.
브로콜리너마저 - <청춘열차>
들으시면서 읽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과거'란 참 어려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과거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땐 한없이 낭만적이지만, 추억에 잠겨 한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들을 '과거에 갇혀 현재를 살지 못하는 미련한 인간' 취급하는 게 냉혹한 현실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결국 '추억팔이'도 결국 현재를 그럴듯하게 잘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특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부터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추억팔이, 즉 내가 지난 5년간 겪었던 병마 이야기다. 나의 이야기를 엮어 책으로 엮어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싶은 마음은 늘 있었지만 항상 '나에게 그런 자격'이 있나, 스스로에게 반문하곤 했다.
내가 앓고 있는 백혈병은 대개 의학적으로 조혈모세포 이식을 받은 후 5년이 지난 뒤 '완치'라는 가판정을 받을 수 있다. 2020년 9월 4일, 처음 백혈병 확진을 받고 5년이라는 절대 짧지 않은 기간 동안 항암, 항암 부작용, 이식, 수술 등 아주 다채롭고 치열하게 병과 싸웠지만, 아직 의학적 기준에선 완치와 거리가 멀다. 사회적 기준으로 보아도 행정고시를 준비하던 대학생인 상태에서 발병했던 터라 지금의 나는 30살 가까이 먹고 여전히 엄마와 아빠에게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의존해 사는, 무직의, 아픈, 졸업도 못 한 '못난이'이다.
아직도 '내가 글을 쓸 자격'이 있나, 스스로에게 되묻곤 한다. 매번 글을 쓸 때마다, 그리고 후배 환우분들을 만날 때마다 지금의 자신 그대로를 수용하라고 감히 떠들어대면서 아직도 병든 나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나보다. 과거는 과거로 남겨두고 앞만 생각하며 현재에 집중하며 나아가고 싶지만 그러기엔 지난 5년 간의 내가 애처롭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어쨌든 물리적으로 확진 후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으니, 본격적으로 내 경험을 글로써 제대로 풀며 내 오랜 꿈이었던 작가가 되어보려 한다.
'과거에 갇힌 미련한 사람'이라고 불려도 좋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지난 5년 간 애쓴 나를 위한 위로글을 헌정하고 싶다. 지난 5년 간은 이겨내기 위해 그저 시간을 흘려보냈던 것 같다. 좋았던 기억보다 힘든 기억이 많았지만 24살의 나부터 29살의 나까지 모두 보듬어 다시 백성원 나 자체로 되돌아오려고 한다. 그게 기반이 되어야 남은 나의 인생을 살아낼 수 있겠다는 개인적인 신념도 있다.
그간 작가가 되어보겠다고 한글 프로그램에 썼다, 지웠다한 목차들과 단편들이 가득하다. 브런치 작가가 된 지 벌써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나름대로 제대로 준비된 책을 써보겠다고 그저 무작위로 글을 쓰곤 했다.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오늘 갑자기 브런치북을 써보자고 결심한 내가 의아하기도 하다. 기존에 썼던 프롤로그를 무시하고 병원 주사실 내 침대에서 책을 읽다가 문득 떠올린 문장들로 책을 시작하니 머뭇거렸던 시간이 바보같기도 하다.
청춘열차라는 제목은 지금 운영하는 블로그 이름 그대로를 빌려왔다. 발병 후 막막했던 심정을 알기에 환우분들과 보호자분들께 도움이 되고자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객관적 정보를 주로 담고자 한 공간이다. 이미 블로그 제목으로 쓰고 있었기에 다른 제목을 계속 떠올려보려 했지만 더 적합한 이름을 찾지 못했다. '청춘열차'라는 선물같은 노래 이름을 알게 해 준 밴드 브로콜리너마저 분들께 감사하면서도 감히 이 제목을 쓰는 게 결례가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공존한다. 중간에 제목이 바뀔 수도 있다. 하지만 '끝없이 달려가는 우리에게 종점은 없어 / 아직은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날아가야만 해'라는 노래 가사처럼 일단 날아가려고 한다. 5년이라는 시간을 먹는 동안 더 좋은 아이디어를 발견해내지 못한 스스로가 부끄러우면서도, 어쩌면 청춘열차가 필연이었나 싶기도 하다.
최근에 양귀자, 은희경 작가님 등 그분들의 노련한 필력을 보며 그런 재능을 갖지 못해 괜히 작아지곤 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작가님들의 화려한 문장들이 나로 하여금 글을 쓰고 싶게 만들었다. 결정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앞에서도 언급했던 밴드 브로콜리너마저 덕원님이 첫 책을 발간하셨는데, 제목이 <<열심히 대충 쓰는 사람>>이다. 여기서의 대충이란, 덕원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강을 추리는 정도로, 그 내용이 치밀하고 충실하지는 않더라도 어쨌든 해내는 것'이다. 그 말을 불꽃삼아 글을 써보려 한다.
지금까지 거창하고 장황하게 얘기했지만, 요약하자면 5년 간의 투병일기를 써보겠다는 다짐글이다. 써내고 싶은 내용이 많다. 2020년 9월에 발병하여 이듬해 3월 처음 조혈모세포 이식을 받아 건강하게 지냈지만, 2022년 10월 급작스러운 재발을 시작으로 23년 재이식을 받았고 그 와중에 하반신 마비를 비롯한 어마무시한 부작용들을 겪어냈다. 불과 2주 전 마지막 항암을 받기도 했다. 긴 여정이었고 느낀 바가 많았던만큼 블로그에서보다 내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싶다. 이 모든 것을 풀어낼 때까지 내 체력과 정신력이 받쳐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개인적인 욕심을 더하자면, 이 글이 나를, 그리고 다른 누군가도 위로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준비된 것 없어 가볍지만, 그 누구보다 무겁고 진중한 마음을 담아 크게 외쳐본다.
“청춘열차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