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혈병 환자이기 이전에 고시생이었던 스물다섯의 여자애
내용과 무관하지만 좋은 노래를 함께 듣고 싶은 마음에 올립니다.
이 글은 백혈병 확진까지의 이야기 중 1편입니다.
“지리하다”
초등학교 시절 이유 없이 나를 매혹했던 구절이 있다. ‘지리한 장마’. 이것이 윤홍길의 소설 <<장마>>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방금 검색을 통해서야 알았다. 누가 썼는지, 소설 내용이 어땠는지와 별개로 ‘지리하다’라는 표현을 그냥 참 좋아했다. 표준어 ‘지루하다’를 잘못 쓴 비문이라고는 하지만, 이 단어는 표준어가 담아낼 수 없는 특유의 느낌이 있다. 보다 습하고, 끈적이고, 질척이는 느낌. 권태로움과 어우러져 지독히 들러붙는, 찰거머리 같은 꿉꿉함, 그런 매력이 있다. 2020년 여름이 그랬다. 지리했다.
2020년은 모두 알다시피 혼란 그 자체였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온 세계를 못살게 굴었다. 인간이 감히 대비할 수도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일상을 잠식해 나갔다. 당시 나는 일명 행정고시라 불리는 5급 경쟁 공개채용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 시험도 바이러스를 피할 수 없었다. 원래 1차 시험은 2020년 2월 29일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고작 4일을 앞두고 무기한 연기되었다. 허무했다. 직전 시험에서 한 끗 차이로 떨어진 만큼, 직전년도 겨울부터 실력 있는 스터디원들과 우직하게 실력을 쌓아가고 있었고, 고지가 눈앞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나는 그 상황을 융통성 있게 해결하지 못했다. 정부의 방역 수칙을 ‘너무’ 잘 따른 게 탈이었다. 집에서 공부를 못하는 체질임을 알면서도, 방역 수칙을 방패 삼아 열심히 뒹굴뒹굴했다. 스트레스 해소라는 핑계를 대며 당시 유행하던 달고나 만들기 챌린지도 하고, 일절 하지 않던 요리까지 했으니 말이다. 한 마디로 정신 상태가 개판이었다.
5월에 치러진 1차 시험 결과는 정직했다. 다만, 조금의 불운도 따랐다. 일단 ‘복도 쪽 맨 앞줄’이란 자리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험 시간에도 수시로 다른 방 감독관들이 드나들었고, 주 감독관은 코로나 방지 차원으로 비워 둔 자리를 개인 물품 정리 공간으로 썼다. 물론 악의는 없었겠지만, 실력이 없으면 예민하다고, 나는 시험 글을 읽는 대신 속으로 감독관을 욕하며 ‘항의할까, 말까,’와 같은 멍청한 생각만 해댔다.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아, X됐다.’
연이은 불합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더 좋은 자리였으면, 더 나은 감독관이었으면 결과가 달랐을지도 몰라.’ 내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고 계속 회피했다. 실력 부족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나는 그저 도망치듯 마산으로 내려갔다.
부모님은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다. 그게 더 속상했다. 그때 나이였던 반 오십 살. 사회에서 1인분을 해내는 ‘무언가’가 되고 싶었다. 사회적 나이로 보나, 정년퇴직을 앞두신 부모님 나이로 보나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회계사가 된 친구, 선생님이 된 친구, 로스쿨에 간 친구, 대기업에 입사한 친구들 소식이 끊임 없이 들렸다. 스물다섯은 청춘의 나이라고, 다 자신만의 시간대가 있다고 조금 늦어도 된다고들 하지만 나와는 관계없는 얘기라고 생각했다. 그저 친구들은 손쉽게 타는 '그 당연한 흐름'을 타지 못하는 내가 미웠고, 고시 뒷바라지를 하느라 퇴직도 일찍 못하고 계시던 부모님이 불쌍했다. 지금 생각하면 바보 같지만, 당시에는 내가 제일 불쌍한 인간이라도 된 듯 굴었다. 사나흘 간 잠도 한숨 못 잘 정도였으니.
눈을 감아도 항상 두 가지 갈림길이 보였다. 다시 심기일전해서 결국엔 자랑스러운 행정고시 합격생이 되는 길, 나머지 하나는 내 머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사회인이 되는 길. 어떤 길이든 ‘돈을 버는’ ‘사회인’이 되어야 했다. 그 갈림길 사이에서 나는 그저 도망치고 싶었다.
밤낮 설치던 시간이 일주일이 되었을 때, 조바심을 견딜 수 없던 나는 ‘뭐라도 해야겠다,’는 강박에까지 시달렸다. 취업 카페에서 찾은 정보로, 고시에 합격하지 못할 때를 대비해 생각에도 없던 컴퓨터활용능력 시험을 준비했다. 불안감을 장작삼아 4일간 밤새며 1차에 합격했고, 이후 한 달에 걸쳐 2차까지 합격했다. 오랜만에 맛 본 합격은 달콤했다. 건강한 20대라고 자부하던 나는 나를 혹사하며 불안정한 안정감을 찾고 있었다.
또 무엇인가를 해야 하나 조급함이 올라오려 할 때, 다행히 복학 시즌이 다가오고 있었다. 복학을 이유로 다시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 올라왔다. 고시촌의 찌든 담배 냄새, 누군가의 열정일지 나태일지 모를 땀에 쩔은 내, 그 모든 게 섞인 ‘자연스럽고 지리한’ 그 향에 이끌려 다시 경제학 책을 펼쳤다. 그렇게 익숙한 곳에서 또 익숙한 공부를 하다 보니 오히려 생각이 명료해졌다. 아직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고 패기 넘치던 나는 남들에게 ‘고시를 포기하는 나약한 인간’으로 평가받기 싫었다. 커피를 하루에 3잔을 마셔도 피곤하고, 유례없이 늘어난 생리량으로 이불이 흠뻑 젖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걸 ‘내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 증거’로 생각했다. 낭만의 치사량이 너무 높았던 탓이었을까.
2020년 여름, 여전히 코로나가 활개를 치고, 마스크를 계속 써야 했던, 그 사이를 굳이 뚫고 들어오는 텁텁하고 기분 나쁜 습기가 가득하던 시간. 조급한 마음에 심장마저 땀 흘리며 고군분투하던, 모든 게 지리했던 8월의 끝자락. 그 지리한 감각에 마비되어 나는 인생을 최고 난도로 격상시켜 준 ‘그놈’을 인지하지 못했다. 바보같이. 적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다고, 그해 여름, 내가 조금 내려놓고 마음의 평안에 신경을 썼다면 ‘그놈’을 만나지 않았을까 가끔 자책했다. 그런다고 바뀌는 게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어찌 되었든, 그놈은 제 멋대로 내게 왔다.
얄궂게도 나와 같은 성인 ‘백’ 씨를 달고.
백혈병과 조우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