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분, 살 수 있어요 (1)

삶, 당연하던 것이 당연하지 않았던 게 되는 순간

by 성원

Keira Knightley - A Step You Can't Take Back




2020년 9월 4일, 평생 잊지 못할 날이다.


다시 행정고시 합격을 위해 달려보겠다는 당찬 열의와는 달리 몸이 받쳐주지 않던 나날이 반복되고 있었다. 고시와 학교 공부를 병행하는 게 생각보다 스트레스였다. 개강 첫 주임에도 교수님들은 자비 없이 영어로 된 논문들을 쏟아내셨고, 3개월 만에 다시 마주한 고시 공부는 생경하기 그지없었다. 벌써 머리에 과부하가 걸렸다. 하지만 고시생에게 두통은 숙명과도 같은 것, 커피 수혈을 받으며 꾸역꾸역 버텼다.


설상가상으로 피부까지 말썽을 부렸다. 8월부터 팔다리에 크고 작은 빨간 반점이 보이기 시작해 피부과에 갔더니, ‘알레르기성 자반증’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아무리 약을 먹어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9월 4일 그날엔 피부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허리통증으로 밤잠을 설치다 다리가 아파 겨우 일어나 종아리 쪽을 보니,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피멍이 생겨 있었다. 놀란 마음을 겨우 가라앉히고 피부과에 가려고 곧장 일어나 입을 헹궜는데 이건 또 뭐람. 핏물이 나왔다. 깜짝 놀라 거울을 보니 잇몸 전체가 반점투성이에 입술과 입 전체에 핏덩이가 앉아 있었다.


의학 지식이 없는 사람인 내가 보기에도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내 상태를 본 피부과 선생님의 안색이 짐짓 어두워지셨다. 본인이 아는 ‘알레르기성 자반증’ 증상에 이런 건 없다며, 높은 확률로 ‘혈소판 감소증’이 의심된다고, 진료의뢰서를 써줄 테니 상급 병원에 가보라 하셨다. 네이버에 검색해 보니 치료 기간이 최소 1년은 걸리는 병이었다. 무서움보다는 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났다. 하필 왜 이런 중요한 시기에 몸이 아픈 건지,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고향 마산에 있는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한바탕 하소연을 하고 보니 시간이 벌써 오후 4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하루를 날렸다는 생각에 곧장 집에 가 공부를 하려고 했지만, 엄마의 설득으로 양지병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도착하니 3시 56분이었다. 양지병원은 4시까지 외래 접수가 가능했는데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춘 것이었다. ‘운수 좋은 날’이었다.




혈액종양내과. 생소한 과였지만 이름이 왠지 무서웠다. 혈액 수치를 확인하기 위해 채혈을 하고 진료를 기다렸다. 웹툰이나 보려고 했는데 급히 나온 터라 휴대폰 배터리가 방전되었다. 심심한 마음에 괜히 키와 체중을 재고, 혈압을 재며 하릴없이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한 의사 선생님이 급히 진료실로 들어가시더니,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나와 이름이 같았던 양성원 선생님. 선생님은 대뜸 “혼자 오셨어요?” 물으셨다.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한숨을 내쉬더니 “혈액 수치 결과, 급성백혈병입니다.”라는 현실감 없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백혈병이 암인지도 몰랐다. 그저 일일연속극 속 비련의 여주인공이 걸리는 병. 반사적으로 “목숨엔 지장 없는 거죠?”라고 되물었다. 그때 내 양손을 꼭 잡으시며 했던 말씀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환자분, 살 수 있어요.”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