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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ic Kim Sep 24. 2018

#1. 이렇게 나는 디지털 노마드가 되었다 Part 4

(싱가포르 생활 그리고 다시 고국으로)

업무의 만족도는 상당히 높은 회사이다. 출장비율이 70%이고 전세계 곳곳을 다녀야 했으며 업무에 대한 자유도도 상당히 높은 편이었기에 평소 이런 삶을 추구하던 나는 상당히 만족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근무할 때부터 '더 큰 자유'를 꿈꿔왔고 그 자유가 출장과 상당히 큰 연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이런 살인적인 출장마저도 너무 감사하게 생각하며 즐길 수 있었다.


회사의 문화는 한국회사의 그것과는 꽤나 상이했다. 특히 이런 부분은 업무 방식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한국에서는 해외 출장을 가기위해서 가기전 출장보고서 그리고 파트장 승인, 팀장 승인, 사업부장 승인, 본부장 승인을 득해야 했으며 갔다 와서도 마찬가지로 출장보고서를 작성하여 파트장, 팀장, 사업부장, 그리고 본부장까지 차례로 승인을 득해야 했으며 해외출장을 하나의 특권처럼 여기는 문화로 인해 출장 승인을 받으러 갈때마다 눈치를 봐야했고  종종 '너가 고생했기 때문에 보내주는 거야'라는 얘기를 들어야만 했었다. 반면에 싱가포르에서는 출장승인은 파트장 결제로 끝났으며 출장을 가지 않고 사무실에 있는 날이면 주변 눈치를 살펴야 했다. 해외영업 및 마케팅을 하는 직원이 고객을 만나러 가지 않고 사무실에 있는 것, 즉 출장을 가지 않는 날은 '쉬는 날'처럼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고 그런 날이면 시장조사 등 여러가지 잡무를 하게 되었는데 그마저도 3~4일 정도 지속되면 팀장의 '한마디'를 듣고 출장계획을 잡아야만 했다.  물론 본사안에서 근무하는 영업사원으로서 요구하는 역할이 싱가포르의 아시아 지사에서의 역할과 같을 수는 없고 이 때문에 출장비율이 급격하게 적을 수 밖에 없다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출장을 특권처럼 여기는 그 문화는 당시에 꽤 불합리하게 보였으며 꽤나 갑갑하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역으로 새로운 회사안에서의 이런 업무 방식이 상당히 만족스럽게 느껴지게 되었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한달 3주이상을 해외에서 보내야 했던 시간, 그 시간동안 정말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제조업이 부흥하던 1990년대 인도네시아로 건너와서 제조업을 하며 공장부지를 매입해 지금은 매입한 토지로 부자가 된 제조업 사장님 부터, 시장조사를 위해 아시아 곳곳을 돌아다니는 유럽계 컨설팅회사 컨설턴트까지 각기 다른 산업의 사람들을 만나며 나라와 산업간의 '연결'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미 부자가 된 인도네시아 제조업 사장님이 베트남 및 미얀마에 시장조사를 위해 직원을 파견하거나 컨설팅업체를 고용해서 조사를 의뢰하는 이유, 미얀마 양곤의 일부 '외국인들이 살만한(살고 싶다는 이야기가 아님) 지역'의 아파트 월세가 싱가포르의 그것과 비슷할 수 밖에 없는 이유, 말레이시아 조호바루가 투자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이유 등 세계 각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원인은 각 나라의 특정 현상으로 나타난 현상들이 아니라 여러 나라들의 복합적인 현상의 결과이었던 것이다. 




'연결'을 이해한 그리고 빠르게 행동을 한 사람들이 회사를 설립하고 성장시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이 연결에 대해 지속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싱가포르에서 고용된 이유도 사실 이 '연결' 때문인데 이런 연결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을까? 어디서 더 많은 기회가 열리게 될까? 나도 연결을 이용한 사업을 할 수 있을까?

 근무를 시작한지 1년이 넘는 시점 그리고 '연결'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던 그 때 처음으로 '사업'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업하는 사람들의 DNA는 다르다'는 평소 신념때문에 사업에 대한 관심은 적은 편이었으나 목표인 '더 큰 자유'에는 이런 라이프스타일을 유지시켜줄 경제적 보상이 필요하다라는 결론으로 인해 조금씩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업'이 과연 내가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에 필수적인 요소인가?




이런 생각을 조금씩 하던 그 날, 와이프의 회사 합격소식을 듣게 되었다. 외벌이로서 싱가포르에서 3인가족 생활비를 감당하기에 벅차 맞벌이를 제안한지 6개월이 지난 어느날 여러번 면접을 진행했었던 글로벌 IT 기업의 영업관리 부서에 최종합격을 하게 되었고 괜찮은 연봉과 함께 그간 해온 사업과 관련된 모든 생각들은 사라지게 되었다. 와이프와 내가 함께 버는 금액을 합치면 싱가폴에서 아이 한명과 살기에 문제없는 수준으로 올라가기에 밝은 미래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큰 안도감으로 이제 싱가포르에서 밝은 미래만 꿈꿀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꿈은 금방 깨어졌고 현실적인 고민이 시작되었다. 

갑작스러운 아내의 임신 소식, 임신 8주라는 소식에 상당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는데 이는 와이프가 다니던 회사가 입사 6개월안에 어떤 이유로든 휴직할 수 없다는 조항때문에 임신 휴직이 안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때 와이프가 임신 및 건강상의 이유로 몸무게가 평소보다 10킬로 이상 빠지면서 사실상 일을 하는게 불가능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유치원 과정을 마친 첫째아이가 지원한 싱가포르의 초등 공립학교의 입학이 거절되면서 어쩔 수 없이 국제학교를 보낼 수 밖에 없게 되었고  와이프는  그 시점에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다. 추가된 비용 그리고 줄어 든 수입, 내가 추구하는 삶을 살기위해 당장 해결책을 찾아야만 했다. 

그러나 해결책은 보이지 않았고

추가된 생활비만 한달에 최소 3000불 수준이었으며 줄어든 수입을 고려하면 이미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는데 여기에 둘째가 태어나서 생기는 비용, 추가되는 생활비까지 고려해보니 싱가포르에서 머무는 것은 어렵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답은 결국 한국으로의 복귀였다. 내 개인적인 목표보다는 가족이 훨씬 중요했기에 어쩔 수 없었지만 당연한 선택이라고 마음을 다 잡고 싱가포르에서 모든 것을 정리한 2015년도 초여름 즈음에 다시 한국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삶도 싱가포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을 기대하면서. 


<싱가포르 창이공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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