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초보운전을 뗐다. 운전을 배우고 10개월 만에, '혹시 모르니까 이달까지만'을 몇 번 반복한 끝에 스티커를 떼었다. 스스로에게 준 마지막 퀘스트 장소는 북악스카이웨이였다. 구불구불 난코스로 유명한 이 길을 아주 작은 문제도 없이 다녀오면 초보를 뗄 자격이 있으리라.
결과는? 싱거운 성공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곤 바로 스티커부터 뗐다. 글자가 붙어있던 주위에 부옇게 먼지가 내려있었다. 슥 손으로 쓸자 '초보'라는 단어가 지워졌다.
기분 좋다. 뭐가 됐든 나의 성숙을 보는 건 이렇게 기쁜 일이다. 세상사 다 이렇게 '초보'를 졸업하는 명확한 순간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나는 아직도 삶에 필요한 거의 모든 면에서 초보다. 잘하는 것 몇 가지를 가지고 어떻게 겨우 살아가지만 대부분의 일에 아직 서툴다.
어릴 땐 어른이 되면 그때부터 어른일 줄 알았다. 좀 겪어보고 그게 그렇게 뿅 하고 되는 게 아니었단 걸 알게 됐다. 어른이라는 건 어떤 성숙의 결정 단계가 아니라 정신이 자라기 시작하는 분기점인 것 같다. 우리는 어른이 되는 그제야 이제 막 어른을 시작하게 된다. 삶의 무언가에 관해 초보를 떼는 순간은 그로부터 한참, 한참 뒤의 일이다.
내 질문은 언제나 같았다. 대체 우리는 언제 '초보어른'을 뗄 수 있는가. 언제쯤 나는 성숙한 내가 되는 걸까. 늘 막막한 질문이었다. 어른은 어떻게 살면 좋을지 물어볼 진짜 어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최근에야 그 언제를 가늠할 수 있게 됐다. '초보어른'을 떼는 시기는, 아마도 함께 삶을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알아보는 순간이 아닌가 한다.
정말 어른이 되면 먼저 슬픔을 알게 된다. 멀어 닿을 수 없는 꿈이, 그럼에도 최선을 다하는 우리 하루들이, 무수한 저마다의 사연들이, 그게 다 슬픔이었음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다.
나이를 먹을수록 눈물이 많아지는 건 약해져서가 아니다. 호르몬 때문도 아니다.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이 슬픔이었다는 걸 이제 알기 때문이다. 이젠 나의 엄마가, 아침방송에 나온 중년배우가 왜 그렇게 눈물이 많았는지 조금 알 것 같다.
누군가의 상처를 알아채는 사람. 그 슬픔에 관해 조용히 생각에 잠기는 사람. 그 사람은 이제 초보가 아니다. 그게 어른이라 말할 수 있는 자격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