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에 하늘이 한껏 펼쳐졌다. 태풍이 지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가을이 왔다. 창문을 열어본다. 상쾌한 바람이 분다. 왠지 바람도 저 하늘처럼 캔디바색일 것만 같다. 이제는 빨래도 잘 마를 것이다. 잠시 그대로 창을 열어두고 올해의 가을을 환영했다.
내가 맞이한 건 하늘과 바람만이 아니었다는 걸 그날 밤 알게 됐다. 왜엥- 자려고 눕자 모기가 존재감을 드러낸다. 아 그렇네, 가을엔 너도 오는 거였지. 왜엥-이 들릴 때마다 허공에 팔을 휘적거리길 반복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일어났다. 미친... 잡아야겠다.
한 손엔 플래시를 켠 휴대폰을, 또 한 손엔 무선청소기를 집어들었다. 하필 그날 또 무슨 전기공사를 한다고 건물이 다 정전이었다. 온통 깜깜한 집안에 플래시를 이리저리 비춰가며 수색한 끝에 커튼에 붙은 모기를 찾아냈다. 살금살금 청소기를 모기 엉덩이에 대고 버튼을 눌렀다. 모기가 청소기 안으로 쏙 빨려들어갔다. 예쓰! 어떠냐 이것이 휴먼의 테크놀로지다. 승리의 쾌감을 만끽하며 침대로 돌아왔다. 휴, 이제 좀 자겠구나.
왜엥- 다시 자려고 눕자 모기(2)가 존재감을 드러낸다.
잠깐 잊고 있었다. 휴먼은 모기를 이길 수 없다. 모기를 집에 들인 그 순간 승패는 이미 결정된 것이다. 자다 일어나 날 괴롭히는 모기들을 모두 때려잡았는가. 그럼 진 것이다.
이미 수면모드에 들어간 몸을 일으켜 찬 형광등 불빛을 쬐이고, 너무 무겁지 않으면서 손에 착 들어오는 모기 때려잡기 좋은 책을 찾고, 막상 불을 켜니 어딨는지 안 보이는 모기를 찾아다니고, 그래도 안 보여서 요가하는 사람처럼 방 한가운데 앉아 소리라도 들어보려 정신을 집중하고, 마침내 문 위쪽 혹은 천장 구석 각이 애매한 곳에 앉아있는 모기를 찾아서 겨우 때려잡아 또 하나의 핏자국을 벽지에 남겼다면, 그러는 사이 이미 박살난 다음 날 컨디션을 애써 모른 체 '그래도 잡았다'고 정신승리하며 다시 잠을 청했다면, 당신은 진 것이다.
그래 생각났다. 나는 또 졌다. 나는 더 이상 화내지 않는다. 겸허히 그 사실을 인정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불 밖으로 왼팔을 꺼낸다. 내가 졌어, 왼팔 먹어. 그 대신 날 더 괴롭히지 말고 우리 각자 할 거 하자. 난 잘게, 넌 왼팔 먹어.
누워 선잠이 든다. 그렇게 누워있으면 꼭 어딘가 떠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머릿속에 이런저런 잡생각이 오간다. 움직였더니 덥구나. 아직은 초가을이네. 에어컨 틀고 싶은데 정전이라니. 다섯 시까지 정전이라던데 지금 몇 시지. 아오 저놈의 모기새끼 때문에. 왼팔이 좀 간지러운 것 같다, 지금 먹고 있는 건가. 그래도 움직이지 말고 참아야지. 괜히 움직이면 한방 맞을 거 두방 맞는다.
가만, 그러고보니 36.5℃면 인간의 체온은 꽤 높은 편이잖아. 그럼 모기는 한여름에도 늘상 덥게 먹었겠네? 아니 이 무슨 숭늉도 아니고. 모기도 웬만하면 시원하게 먹고 싶을 텐데. 저번 여름에 잘못 시켜서 땡볕 아래 뜨거운 아메리카노 마시던 생각이 나는군. 참 모기도 이런저런 고충이 있구나. 이왕 이렇게 된 거 내년 여름엔 왼팔에 얼음을 좀 대놓고 자보면 어떨까. 모기한테 '아이스피' 한잔 대접해보자.
그런 생각을 하며 스르르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