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장 저쪽에서 누군가 잘못 찬 공처럼 문득 엉뚱한 주제가 내 머릿속에 굴러들어올 때가 있다. 동그랗게 흥미로운 것들이라 걷어차서 돌려보내는 대신 잠깐 곁에 두고 괜히 이리저리 드리블을 해본다.
비틀스 노래 중 여자 이름이 제목에 들어간 곡은 다 해서 몇 곡일까? 이를테면 그런 공이 발 밑에 데굴 오는 것이다. 그럼 굴려보지 않을 수 없다. 음.. 미쉘, 줄리아, 루시, 음.. 요코, 프루던스.. 잠깐. 프루던스는 남자애였던가? <Everybody's Got Something to Hide Except Me and My Monkey>에서 몽키는 요코의 애칭인데 이것도 세어야 할까? 이렇게, 구른다.
이 작가가 지금까지 살해한 사람이 대체 몇 명이고 사인은 얼마나 다양할까? 윤성희 책을 볼 때는 그런 공이 날아오기도 했다. 윤성희는 등장인물 잘 죽이기로 유명한 작가인데 하도 아무 일 아닌 것처럼 인물들의 자리를 비우는 걸 보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책을 덮고 엑셀파일에 작품/페이지/이름/사인/사건경위 같은 항목을 넣고 '윤성희의 킬링노트'를 만들어보는 상상을 했다. 그 후로 윤성희 책에서 누군가 죽을 때마다 그 생각을 반복했다. 자주 책장을 덮었다. 머릿속 엑셀에 이따금씩 새로운 행이 추가되었다.
두근두근이란 단어는 정말 오묘하구나. 영화를 보다 그런 공도 날아왔다. 두근두근 뒤엔 무슨 말을 붙여도 상상력을 일으킨다. 엉뚱한 말들을 잔뜩 붙여봐도 두근두근의 로맨틱함에 전염되지 않는 단어가 없다.
두근두근 장티푸스. 두근두근 연말정산. 두근두근 수리부엉이. 두근두근 헌혈의집 두근두근 독립만세 두근두근 무단결근 두근두근 아핏차퐁위라세타쿤 두근두근 칫솔치약 두근두근 나무위키 두근두근 반팔티 두근두근 질병관리본부 두근두근 공기청정기 두근두근 콘프레이크 두근두근 호연지기 두근두근 미나리볶음밥 두근두근 자이언티. 두근두근 다이나소어. 두근두근 사각팬티. 두근두근..
숲, 해.
숲에 관한 산문을 읽으며는 말들의 생김새라는 공이 왔다. 숲이란 말은 정말 숲같이 생겼고 해라는 말은 정말 해처럼 생겼다. 숲의 시옷(ㅅ)과 자모 우(ㅜ)는 나무를 닮았다. 나무가 선 피읖(ㅍ)엔 숲의 청량함이 담겨있다. 그래서 숲, 하고 발음하면 숲의 바람이 들린다. 해는 또 영락없이 겁나 해같이 생겼다. 해는 히읗의 둥금에서 시작해 위와 옆으로 뻗치는 복사열로 이뤄져있다. 숲, 해.
두근두근, 숲, 해.
미쉘, 줄리아, 루시, 요코.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