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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chun Kim Jul 31. 2021

어떤 캐릭터


지하철을 타고 망상을 하다보면 어떤 캐릭터들이 떠오른다.


이를테면 이런 인물이다.


'비가 올 때마다 뭔가 하기로 마음 먹은 사람.'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비가 오면 무슨 일을 할지는 나도 모른다. 그냥 그런 사람이 있으면 무언가 이야기가 생겨날 것 같다.


'중요한 순간에만 가위바위보를 이기는 여자.'


이 여자는 결정적인 순간에 반드시 가위바위보를 이긴다. 이게 이 여자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이끈다. 예컨대 이 여자가 사랑에 빠지는 것도 누군가와의 가위바위보를 이김으로써 어떤 사건이 생기기 때문이다. 물론 그게 뭘지는 나도 아직 모른다.


내친김에 분류를 해보자. 살짝 골때리는 특이한 캐릭터들이 있다. 영화로 치면 이야기가 늘어질 때쯤 유머를 날리는, 모두에게 사랑받고 기능적으로도 필요한 조연 캐릭터다. <건축학개론>의 납뜩이나 <족구왕>의 창호(어, 난 다시마만 먹어) 같은 인물이다.


'<타짜>를 너무 좋아해서 이백오십 번을 본 사람.'


우선 이런 인물도 있다. 이 사람은 세상의 거의 모든 영화를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타짜>에 반쯤 미친 자다. 타짜를 너무 좋아해서 틈만 나면 본다. 밥을 먹을 때나 빨래를 갤 때도 늘 틀어놓는다. 몇백 번을 봤지만 중요한 장면들에선 항상 숟가락을 멈추고 삼단으로 개던 수건을 든 채로 멍하니 또 화면을 본다. 너무 많이 봐서 대사를 통째로 다 외우고 있다.


 캐릭터의 특징은 누군가와 대화할  틈만 나면, 그야말로 어떻게든 껀덕지만 있으면 타짜 드립을 날린다는 것이다. OO 아냐구요? 제가 아는 OO 중에 최고였어요 / 동작 그만. 밑장 빼기냐? / 늑대새끼가 어떻게  밑으 들어갑니까 /  OO 하면  변사체가 된다 / 마지막 원칙.  바닥엔 영원한 친구도 원수도 없다.


주변 사람들은 처음엔 그걸 재밌어하고 나중엔 고개를 절레절레한다. 그러다 꼭 필요한 적재적소의 결정적 상황에서 주인공 캐릭터에게 <타짜>를 인용한 대사 한방을 날리게 된다(그게 어떤 상황인지, 그 대사가 뭔지는 물론 아직 나도 모른다).


'나무위키만 하는 사람. 끊임없이.'


이 사람은 아는 게 정말 많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나무위키의 상당 부분을 작성한 게 이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 작성한 항목도 틀린 부분이 있으면 깔끔하게 수정을 해놓는다.


돈을 벌거나 일을 하진 않는다. 아니 애초에 밖에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점심메뉴 선택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사람.'


인간이 살면서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뭘까? 그건 근원에 관한 것도 목적에 관한 것도 아니다. 실존에 관한 것이다. 매번 반복되는 같은 어려움, '점심 뭐 먹지?'다.


이 사람은 점심메뉴 선택에 있어 기가 막힌 판단력을 발휘한다. 회사 근처 식당을 모두 꿰고 있고, 질문자의 성향과 컨디션을 고려해 최선의 선택을 내려준다. 모든 사람들이 점심시간만 되면 이 사람을 찾아 신탁을 받는다.


좀 무거운 캐릭터들도 물론 있다. 어떤 진지한 이야기의 중심이 될 것 같은 인물들이다. 쓰다 보니 끝도 없을 것 같아서 이하는 한 줄씩 소개만 해본다.


'서서히 우울증에 빠지는 아내를 필사적으로 보살피는 남편'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자신도 모르게, 고요히 스스로를 치료하는 사람'


'더이상 세상에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 인간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고자 노력하는 사람'


불편하고 조금 심술궂은 캐릭터들도 있다.


'약에 취해서 자기 손가락이 가위로 짤리는 것을 보고도 낄낄거리는 아이들'


'생전 처음 선물받은 모피코트 때문에 죽게 되는 가난한 여자(그 코트는 사실 싸구려였다)’


'출근길에 들고 있던 우산으로 뒤에 있던 모르는 사람의 눈을 찔러 실명시키게 되는 어떤 착한 사람.'


이들 모두 내 맘에 든 인물들이다.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들은 나 스스로 뒷얘기가 궁금하게 만든다. 비가 오면 하려고 마음먹은 일은 대체 뭘지 나도 궁금하다. 가위바위보를 이기는 능력이 삶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지, 그 끝에 뭐가 있을지 알고 싶다. <타짜> 대사를 읊는 사람이 결정적인 순간에 인용할 대사는 과연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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