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건대 나도 웹소설을 써본 적이 있다. 때는 2016년, 장르는 무려 로맨스였다.
본격 연애소설 <무설탕 김광철>. 주인공 김광철은 연애세포라곤 1도 없는 천문학도다. 과학과 공학을 좋아하고 세계사와 동양철학을 애호하는. 의외로 문학적 소양이 좀 있고 영화와 음악을 좋아한다.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오징어볶음. 기계와 미디어를 혐오하며, 당연히 연애경험은 없다.
이 김광철이 갑자기, 무조건, 당장, 연애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김광철의 어떤 행동을 보고 어머니가 쟤를 저대로 놔두면 안 되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어떤 행동이란 '선인장 에피소드'로, 당시 썼던 내용을 떠올려 재구성해보면 대략 이런 상황이었다.
일요일 오전. 늦잠을 잔 김광철은 혼자 식탁에 앉아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있다.
베란다에서 김광철의 엄마가 말한다. "어머 이게 뭐야, 세상에 꽃이 달렸네."
엄마의 들뜬 목소리에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누나가 베란다로 갔다. 여러 화분들 가운데 작고 앙증맞은 선인장이 있었는데, 거기 꽃이 폈다. "진짜네, 와 너무 예쁘다."
앙증맞고 수줍은 분홍꽃이었다. 선인장이 그 자리에 있은지도 벌써 7년이다. 꽃을 피운 것은 처음이었다. 머리에 꽃을 단 선인장은 어쩐지 살짝 부끄러우면서도 당당해보였다.
들뜬 엄마와 누나는 연신 예쁘다를 연발하며 찰칵찰칵 사진을 찍어댔다. 엄마는 7년 전 이 선인장을 처음 데려왔을 때를 떠올렸다. 저 작고 연약한 녀석이 이렇게 예쁜 분홍을 틔우다니. 괜히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그런 엄마와 누나 뒤로 김광철이 조용히 다가왔다. 우물우물 오징어볶음을 씹으면서, 입가에도 좀 묻히고.
김광철이 온 것을 보고 엄마가 말했다. "광철아 이 꽃 좀 봐, 너무 예쁘지 않니? 어쩜 대견하게도 이렇게 앙증맞은 꽃을 다 피웠을까."
김광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김광철은 그대로 선인장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아무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선인장에 달린 그 꽃을 따서 먹었다.
커진 눈으로 경악스러워하는 엄마와 누나에게 김광철이 말했다.
"이게 몸에 그렇게 좋다며?"
충격을 받은 엄마는 불치병을 연기한다. 자신이 영양사로 일하는 병원에 입원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김광철을 속인다. 누가 봐도 그건 발연기였고, 사실 지난주에 본 드라마 장면을 따라한 거였지만 매사에 진지하며 12살 이후로 티비를 보지 않은 김광철은 끔뻑 속는다. 엄마의 마지막 소원인 연애를 결심한다.
<무설탕 김광철>을 쓴 이유는 사실 회사 일 때문이었다. 당시 회사는 소셜데이팅 앱을 출시했는데, 직원수 4명의 좆좆소라 마케팅할 돈이 없었다. 이야기를 끌고 가면서 스리슬쩍 김광철이 우리 회사의 소셜데이팅 앱을 쓰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이걸 좀 재밌게 쓰면 마케팅 효과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해본 거였다.
이후 연애하는 법을 모르는 김광철은 물어물어 소셜데이팅이란 것을 처음 해보게 되고, 카톡도 안 깔고 살던 김광철은 거의 논어 수준의 진지한 프로필에 "온라인 데이팅이라니... 요사스럽구나" 하는 말들을 써놓고서 한복 입고 정좌하고 찍은 사진을 올렸는데, 그걸 유머감각으로 오해하고 빵터진 여주인공 은하를 만나게 된다. 은하는 실은 작사 작곡부터 풀밴드 악기를 모두 혼자, 그것도 최상급의 실력으로 다루는 천재 싱어송라이터이자 1인밴드이며, 은하의 1집 <갤럭시>는 그 깐깐한 김광철도 인정하는 명반이었다.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원래 좀 엉뚱한 은하는 '내 사진을 올리고 내가 은하라고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장난삼아 해본 거였고.. 뭐.. 그런 컨셉이었다.
한동안 이메일로 대화하던 둘은 이후 만나게 되고, 김광철은 파스타집에 가서 "오징어 들어간 거 없냐"고 물어보고선 그런 건 없다고 하자 "그럼 하얀 걸로 달라"고 주문해 직원을 당황시키고, 과학자 중에 제일 힘센 과학자는 다윈이라거나 하는 저질 농담을 정색으로 정성들여 하고, 은하는 그런 김광철이 컨셉(설마 저게 진짜 성격이라곤 믿을 수 없으므로)이라고 오해하며 또 빵터지고. 둘 다 우주 덕후였으며 칼 세이건을 좋아하고, 차 안에서 은하는 명곡 'Star Stuff'를 연주해주고, 혼자였던 엄마는 병원에서 잘생긴 중년 돌싱 의사와 썸을 타게 되며 또 다른 연애 라인이 형성되고. 무설탕이지만 겁나 달달한. 손발은 오그라들다 못해 이미 소멸되어 없어지고 거의 물고기가 되어버리는, 뭐 그런 내용들이었다.
나름 여러 복선과 캐릭터를 만들면서 재밌게 썼으나 얼마 못가 중단하게 되었다. 3화인가까지 썼을 때 아무리 돈이 안 드는 거라 해도 소설이라는 건 들이는 품에 비해 마케팅 효율이 절대 나올 수 없는 행위라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늘 그놈의 ROI가 문제다.
지금도 회사에 무뚝뚝하고 사회성 부족한 개발자가 새로 들어오면 김광철이 생각난다. 당시 아무런 마케팅 효과도 거두지 못했지만 재미는 있었는데. 땅에 떨어진 무설탕 츄파춥스를 개미들이 피해가는 광고이미지를 (개념 없이) 갖다 써서 고딕체로 '무설탕 김광철' 하고 표지도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무설탕 김광철을 마무리 지어보고 싶다. 즐거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