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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chun Kim Oct 17. 2021

중대초등학교 감나무 아래 20만원 있다

동네를 뛰어놀다 지갑을 주웠다. 아마 초등학교 2학년 때였을 것이다. 지갑엔 십만원 짜리 수표 두 장이 들어있었다. 쌍쌍바가 100원, 스낵면이 240원 하던 시절이었다.


어린 마음은 우선 고민했다. 이런 일이 생기면 경찰서에 갖다줘야 한다던 슬기로운 생활 32페이지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지갑을 잃어버린 아저씨(왠지 양복을 입고 있다)가 허둥지둥 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맴돌아 연약한 멘탈이 괴로웠다.


괴로웠지만, 그러면서 20만원이면 오락실에서 킹오파를 몇 판이나 할 수 있을지도 생각하고 있었다. 나의 산수로는 계산이 전개되지 못하고 자꾸 처음으로 돌아왔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사실 나는 슬기로운 생활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다.


당시 같이 놀던 동네 형들 중에 나이가 제일 많은 형이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무려, 고학년이었다. 고학년 씩이나 되어서 2학년 잼민이들이랑 놀던 형은 지금 생각해보면 좀 모자란 형이었지만 당시엔 거의 첫출근한 신입사원이 보는 본부장님이나 다름없었다.


형은 어디서 주워들은 게 있었다. 아니면 제 딴엔 나름의 잔꾀를 부리려던 것이었을지도.


"수표에는 고유번호가 있다. 이 돈을 쓰면 고유번호를 추적당해 잡혀간다."

"고유번호는 유효기간이 10년이다. 10년 이따 쓰면 안 걸린다."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역시 고학년이시다.


과연 한심하기 짝이 없는 소리였지만 소독차를 쫓아 옆 동네까지 달리고 성당에 방구탄이나 던지던, 테크니컬리 당시 키우던 말티즈와 지능이 엇비슷하던 나에게 형의 컨설팅은 그야말로 대박 솔루션이었다.


그래도 아주 바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몰래 형을 따돌린 뒤 집으로 돌아왔다. 모종삽을 들고 혼자 학교 동산에 올랐다. 적당한 곳을 찾다 감나무를 발견했다. 전에 태극잠자리를 잡았던 좋은 기억이 있는 나무다. 아래를 파고 조심스럽게, 수표 두 장을 넣은 비닐봉지를 묻었다.


"10년... 10년만 기다리면 킹오파를 백 판은 할 수 있다." 나는 얼른 어른이 되고 싶었다.



때론 몇 시간이고 손님이 없는 오전 시간의 편의점 알바란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린 기억마저 돌아오게 만든다. 군대 가기 전에 잠깐 아르바이트를 하던 스물몇 살 때였다. 잊고 살던 그 감나무가 번뜩 돌아왔다.


모교의 동산은 여전히 정겨웠다. 그래, 늘 교실보다 이 동산을 좋아했다. 내가 들어서길 기다린 것처럼 나무들이 서늘한 그늘을 내려준다. 비밀통로에 들어온 것 같다. 동산은 여전히 그때 그 동산이었다.


아마 있겠지? ...설마 있을까? 묻어둔 타임캡슐이라도 꺼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지, 타임캡슐보다 더 흥미진진할 수밖에. 추억에 더불어 실물가치까지 있는 캡슐이니까.


감나무 아래  나는 허탈하다는  본래 이런 뜻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한참을 서서 그냥 낄낄 웃는 일밖에  일이 없었다.  동산엔 최소 13그루의 감나무가 솟아있었다. 내가 2 잼민이었을  분명 감나무가  그루였던  같은데. 동서남북 어디를 파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과거의 나의 멍청함 x 현재의 나의 청멍함'이 공동기획한 대환장 콜라보에 부끄러움과 허탈함을 느끼며 낄낄거리다 그렇게 땅은 파보지도 못하고 내려왔다.


운동장 구석에 폐타이어로 빙 두른 징검다리와 철봉이 보였다. 저기 땅을 파면 동전도 쏠쏠히 나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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