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ngchun Kim Jun 25. 2023

삶의 목표 찾았다

책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안내서>엔 ‘깊은 생각’이라는 이름의 슈퍼컴퓨터가 나온다. 이 세계관에서 우주에서 가장 지능이 높은 생명체는 사실 쥐인데, 그 쥐들이 삶과 우주의 해답을 찾기 위해 세대와 세대를 이어서 이걸 만들었다.


수백만 년의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깊은 생각이 완성되었다. 침을 꼴깍 삼킨 후, 쥐들은 물었다. “삶과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알려달라고. 알겠다고, 깊은 생각이 답했다. 그리곤 연산을 위해서 750만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다시 수백만 년이 지났다. 약속한 날이 되었고, 쥐들은 깊은 생각 앞에 모였다. 샴페인도 충분히 챙겨왔다. 깊은 생각이 입을 열었다. “삶과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답으로, 이렇게 답한다.


“42.”


잠깐 사태를 받아들이기 위한 시차가 고요히 흐른다. 쥐들이 샴페인병을 거꾸로 들고 무언가 깨부수려 할 때쯤 깊은 생각은 말한다. 처음부터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잘못된 질문을 넣었으니 잘못된 답이 나온 거라고.




‘삶과 우주. 그리고 모든 것’ 류의 추상적인 좆같은 질문을 나도 여럿 품고 살았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장래희망이 뭔가

어른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꿈이 뭔가


추상적인데 막연하고 어쨌든 좆같은 질문들이다. 슈퍼컴퓨터도 아닌 나의 뇌에 이런 질문들을 넣고 작고 소중한 능지를 365일 24시간 100% 풀가동 해봐야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잘못된 질문들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니까 억울하다. 사회로부터 강요받은 이 막연하고 추상적이고 아무튼 좆같은 질문들에 한눈 팔려서 에너지만 쓰고 답을 찾는 게 오래 걸렸다.




그러다 답을, 최근에 찾았다. 문득 그렇게 됐다. 앞으로 누군가 “삶의 목표가 뭐냐”고 나에게 물어오는 정신나간 휴먼을 또 만나게 된다면 나는 “삶의 행복총량 극대화”라고 답할 것이다.


삶의 행복총량 극대화. 맘에 든다. 이거다. 무언가를 왜 이루고 싶은가. 왜 무엇이 되고자 하는가? 결국 다 행복하기 위함이다.


나에게 행복을 주는 뭔가를 사기 위해 돈을 쓴다. 불행에 대비하기 위해 돈을 아낀다. 함께 있으면 행복함을 느끼게 만드는 누군가와 연애를 하고, 그날치 행복이 부족한 거 같아서 퇴근 후 소시지 추가한 마라샹궈를 시켜먹는다.


생각해보면 어렴풋한 추측으로나마 늘 알고 있던 해답이었다. 근데 그걸 답으로서 정의내리냐, 그렇지 못하고 멍청한 질문들 사이에서 헤매느냐 사이엔 멀고 먼 거리가 있다.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따위의 자기도 뭘 물어보는지 모르는 질문은 더는 하지 않는다. “이게 삶의 행복총량을 늘리는가?”라고 구체적으로 묻는다. 이 질문 하나만 남겼다. 그러자 모든 게 선명해졌다.




일단 전체 삶의 기간이 길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그러니까 건강해야 한다. 막연히 건강이 중요하지가 아니다. 건강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는 건강하게 오래 살면 삶의 행복총량 극대화에 매우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골고루 잘 먹고 운동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돈도 필요하다. 돈으론 일정 수준 이하의 행복을 살 수 있고 불행을 막을 수 있다. 얼마나 있으면 되는가? 행복을 느낄 수 있고, 행복 총량을 깎아내릴 불행에 대비할 수 있는 만큼 있으면 된다. 명품자켓이 내 삶의 행복총량을 늘리는가? 그렇다고 답한다면 열심히 일해 돈을 모아 자켓을 사면 된다. 자켓을 샀을 때 확보될 행복총량이 그걸 사기 위한 노동력과 시간 투자보다 행복총량 리턴이 적을 것 같은가? 그럼 그 돈은 필요 없다.


지금 하기 싫은 일이 있다. 이때도 물어본다. “지금 이 일을 하는 게 삶의 행복총량을 늘리는데 기여하는가?” 그렇다면 하기 싫어도 한다. 그건 행복총량 극대화를 위한 투자다. 현재의 작은 행복을 투자해 미래의 더 큰 행복으로 불리는 행위다.


이렇게 쉬운 것이다. 무엇이 되고자 하는 것도, 무언가 이루고 싶은 것도, 무언가 갖고 싶은 것도, 다 결국 행복하기 위함이다. 행복이 목표다. 직업이나 성취나 물건은 수단이지 목표가 아니다. 모호한 질문들은 애초에 필요 없었다.




이 질문을 품고 살게 된 이후 가장 좋은 점은 모든 순간순간에 행복할 거리를 찾게 된다는 것이다. 삶의 행복총량 극대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매 순간의 행복들을 놓치면 안 되니까. 그건 행복총량 손실이다. 나는 집요한 구석이 있는 목표지향적 성향이고 그렇다보니 매 순간 지금 어떻게 하면 행복을 느낄까 자꾸 생각하게 되었다.


‘삶 전체 기간의 총량’이란 점에선 현명한 선택을 고민하도록 돕는다. 작은 행복을 위해 큰 행복을 놓치는 일은 하지 않게 된다. 당장의 작은 행복을 위해 전체 행복을 깎아내릴 위험을 만드는 일도 피하게 된다. 그건 손해다. 목표는 어디까지나 삶의 행복총량 극대화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