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을 나눠 먹는 모임이 있었으면 좋겠다. 근데 그 모임이 비대면이길 원한다. 익명과 택배함과 암호를 활용한, 007 작전인가 싶게 조심스런 사람들의 모임이었으면 한다.
이 클럽의 목적은 과일을 나눠 먹는 것이다. 그뿐이다. 과일을 나누고자 하는 의사를 밝히고, 먹고 싶어 하는 사람과 나눠 먹고, 맛있게 먹었노라 감사를 표하는 것. 아주 간단하다. 중요한 건 과정이다.
클럽 대화방엔 지켜야 할 원칙이 공지사항으로 걸려있다. 제1원칙은 클럽에 대해 발설하지 않는 것이다. 제2원칙은 클럽에 대해, 발설하지 않는 것이다. 제3원칙부터는 모두 클럽의 본래 창설 목적을 지키기 위함이다. 사교 금지. 잡담 금지. 필요 이상의 정중함과 필요 이상의 감사함 금지. 일상 공유 금지. 전도 금지. 청첩장 금지. 고양이 사진 금지. ..고양이? 그래, 고양이도 금지.
무엇을 하지 말라는 말들이 다 지나고 마지막 원칙에 이르러서야 무엇을 하자는 내용이 나온다. 이렇게 쓰여있다.
“이 클럽은 다음과 같은 모임임을 인지하고 존중한다:
이 클럽은 사교가 부담스럽지만 사실 사람을 싫어하는 건 아닌 사람들의 클럽이다. 그리고 과일을 좋아하는 자들의 모임이다. 조각과일이 무언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들의 모임이며, 과일은 본래 다른 사람과 나눠 먹는 음식임을 이해한 모임이다.
(…)
온전한 과일 섭취 경험을 위해 냉장고 속 과일을 사람들과 나누고 약간의 온기 또한 나누는 모임이다. 대면은 싫지만 고립은 더 싫은 사람들의 모임으로, 대면의 플랜B로써 ‘B대면 클럽’으로 명명한다.”
B대면 클럽에 가입하면 과일을 온전히 즐길 수 있게 된다. 이를테면 여름의 수박 같은. 수박은 큰놈을 통째로 대야에 담가두었다가 먹어야 제맛이다. 냉장고에 들어가지 않을 만큼 큰 것. 대야에 담가놓고 몇 시간을 쫄쫄 찬 물에 식힌 놈이어야 한다. 1인분을 잘라서 랩에 싸놓은 조각수박도 있지만, 그걸 먹다보면 역시 아무래도 이게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수박은 본래 그런 것이다. 둥글고 뚱뚱한 구체를 통통 두드릴 때 느껴지는 껍질 안쪽의 떨림. 쩍 하고 갈라질 때 그 쾌감. 석석 가를 때 퍼지는 시원한 향. 창밖의 매미 소리.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둥글게 둘러앉아 하나씩 손에 들고 푝푝 씨를 뱉어가며 먹는 풍경. 그걸 다 한입에 먹어야 온전히 수박을 먹는 것이다.
조각수박을 먹을 때 느껴지는 감정은 어떤 종류의 허기와 같다. 아무리 많은 조각을 먹어봤자 내가 그리워한 수박에 대한 허기는 한 조각도 채워지지 않는다. 어 원래 이랬나. 어 이게 아닌데.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둥글고 큰 알 속에 필요한 게 거의 다 들어있던, 어린 시절 우리가 먹었던 그 수박. 한 입이라도 그걸 먹고 싶은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다 불러모으던 어떤 여름의 그 수박처럼 과일이란 본래 사람들과 나눠먹는 음식이 아닌가 한다. 혼자 먹기엔 일단 양부터 너무 많다. 한 통, 한 박스, 심지어 만원 어치도 냉장고에서 차게 상하기 좋은 양이다.
누군가와 그걸 나눠먹고 싶다. 비록 내 옆집에 사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건 부담스럽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