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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chun Kim Jan 11. 2020

서울시 여러분, 높은 마음으로 살아요


9와 숫자들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솔직히 같은 값이면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쪽이었다.

그쪽은 일단 뭐 코스프레도 같은 것도 하고 오니까.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 NAVER ONSTAGE


겹치는 밴드였다. '구(9)'와 숫자들과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이름부터 그렇잖은가.

어쩐지 음악도 그렇게 느껴졌다. 살짝 찌질하고 좀 골때리는 음악 하는 재밌는 인디밴드, 둘 다 그 정도 느낌이었다.


선택의 순간이 오면 그러나, 언제나 구남이었다. 만약 두 밴드가 같은 시간 다른 무대에 섰다면 나는 큰 고민 없이 구남 쪽으로 갔을 것이다.

구남은 공연마다 컨셉을 정해 코스프레와 분장을 하고 올라왔다. 중세면 중세, 원시면 원시. 볼거리가 있는 쪽은 시선이 가게 마련이다.


거기다 쿨했다.

“언제나 아침엔 내 곁에 다른 여자가 누워있다(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 아침의 빛)"고 말하는 형들이었다.

"울어버릴 거예요 난 이유는 묻지마요(9와숫자들 - 눈물바람)"라고 말하는 대책없는 형보다 나아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정 모텔」이라니. 아니 앨범 이름부터 얼마나 흥미로운가.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2집 「우정모텔」(2011)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제 달라졌다.

지금의 선택은 단연 9와 숫자들이다. 코스프레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시간이 흘러 9와 숫자들은 나의 마음과 나의 언어로 내 얘기를 노래하는 형들이 되었다.


9와 숫자들의 최근 곡을 듣고 있으면 괜히 눈물이 날 것 같다.

<높은 마음> 때부터 어쩐지 코끝이 좀 간지러운 것 같더니 <주부가요>에 이르러서는 난데없이 울컥한다.

<높은 마음>은 이렇다.


엽서 위에 새겨진 예쁜 그림 같은
그럴듯한 그 하루 속에
정말 행복이 있었는지

몸부림을 쳐봐도 이게 다일 지도 몰라
아무도 찾지 않는 연극
그 속에서도 조연인 내 얘긴

그래도 조금은 나
특별하고 싶은데
지금 그대와 같이 아름다운 사람 앞에선

높은 마음으로 살아야지
낮은 몸에 갇혀있대도
평범함에 짓눌린 일상이
사실은 나의 일생이라면
(...)


"높은 마음으로 살아야지, 낮은 몸에 갇혀있대도"라니. 마음이 위아래로 출렁이는 말이다.

"평범함에 짓눌린 일상이 사실은 나의 일생이라면"이라니. 멈칫 서늘한 말이다.

두 문장은 그러나 앞 뒤에 배치되어 끝내 희망적이다.


9와 숫자들 - 9석9석 찾아가는 미니콘서트 Vol. 4


옛날엔 이런 가사를 쓰는 형이 아니었다. 찌질한 형이었다. 툭하면 도망가는 형이었다.

잠깐 돌아보자.


당신을 처음 봤을 때 내 숨은 멎어버렸죠
산소는 충분했지만 알 수 없는 호흡곤란
이것이 사랑이라면 난 하지 않겠어요

<이것이 사랑이라면> 中


아니, 안 하면 어쩌자는 것인가. 대책 없는 형이었다.

하나 더 보자.


함께 있어도 별들처럼 아득한 그대
스쳐가는 짧은 말에도 난 숨을 죽이네
(...)

말해주세요 그대도 저를 좋아하신다고
거짓말이래도 그게 중요한가요

<말해주세요> 中


중요하다. 거짓말이면 다 소용 없다. 이 형만 빼고 다 안다.


<말해주세요>가 OST로 삽입된 인디시트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꿀잼


쿨하게 모텔을 드나들던 구남과 모 라이딩스텔라 형들과 달리, 소심한 이 형들은 자기방에서 곱씹고 이불킥하고 다짐하길 반복하다 문득 세상의 비극과 희극을 이해하게 된 걸까.

가장 최근 앨범 「서울시 여러분」은 음표로 쓴 소설이다.

<주부가요>를 보자.


막둥이 어린이집 보내고 난 뒤
네 시간 남짓 오직 나만의 시간
떨리는 손으로 켠 라디오에선
주부가요대전 B조 준결승

쌍문동 인순이도 잠실 주현미도
내겐 어떤 위협도 될 수 없으리
내가 누구냐 상계동의 노사연이다
내일이면 주부가왕이 될

가정이란 미명 아래서
주부라는 오명을 입고
내 자신을 잊고 살아온
긴긴 어제에 작별을 고해

주부가요 뭐 전기밥솥인가요?
그런가요?
주부가요 뭐 진공청소기인가요?
그런가요?

이제 난 알게 되었어
순탄하다고 믿어온
내 삶에 감춰져있던
외로운 싸움과 상처를

난 가요 이제 가요
당신들이 못 오는 먼 곳으로
남편은 물론이고
자식들도 못 보는 나의 천국

주부가요 뭐 전기밥솥인가요?
그런가요?
주부가요 뭐 진공청소기인가요?
그런가요?

<주부가요> 中


자식들 먹이고 남편 뒷바라지하다 시들어가는 주부가, 어느 날 설거지를 하다 문득 알아버린다.

사실은 그러지 않아도 됐다는 걸, 나도 실패하고 재기하며 화려하게 살 수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아버렸을 때의 기분을 상상해본다.

그 억울함을 풀 곳이 겨우 라디오 주부가요 프로그램이라니. 그마저도 '떨리는 손'으로.


주부는 전기밥솥과 진공청소기를 경품으로 받으면 밥하고 청소하는 기계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건가.

'천국'이라니. 느닷없는 단어가 마음을 흔든다.

전체 가사도 한번 보자. <24L>라는 곡이다.


여기 혼자 사는 사람들의 집집마다
마시지도 못할 물이 가득 쌓여있어
현관 앞에 냉장고 옆이나
베란다 또 거실 한구석에
어김없이 놓인 2리터짜리 열두 병

24 liters of water I know I know
한 방울도 줄지 않는 어떤 것
24 hours of your day I know I know
여전히 고대하는 무언가를 위해

우린 오늘도 고배를 들어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쓴맛의

우리 강아지랑 어머니만 남은 집
동생은 방콕에 아빠는 병원에
나는 여기 집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은 곳에서
하루하루 목마름에 익숙해져가

24 liters of water I know I know
한 방울도 줄지 않는 어떤 것
24 hours of your day I know I know
언제나 보고 싶은 누군가를 위해
나는 오늘도 맥주를 따네
내일부턴 진짜 운동해야 되는데

여기 혼자 사는 사람들의 집집마다
마시지도 못할 물이 가득 쌓여있어
억지로 한 모금 마른 목을 축여봐도
채워지지 않는 텅 빈 어딘가

<24L>


이건 우리의 이야기다. 나의 이야기다.

"한 평 반의 철옹성,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내 자리"에서 잠드는 고시생(물고기자리)도, 출근길 지하철의 섬뜩한 손길을 벗어난 뒤에 "잠시 겁이 났던 것조차 너무 화가 나서, 생각하다가 아차" 열차를 놓치는 그녀도(그녀의 아침).

「서울시 여러분」은 앨범 전체가 우리 삶의 이야기다.


9와 숫자들 4집 「서울시 여러분」 (2019)


이 앨범이 왜 슬픈지 알 것 같다. 이게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 삶이 사실은 얼마나 슬픈 모습인지 삶을 우리 언어로 노래한 곡을 들으면서 알게 된다.


어느 출근길에 앨범을 듣다 문득 알았다.

어른들이 눈물이 많은 건 그 때문이구나. 나이 먹으면 약해지는 것도, 호르몬 때문도 아니구나.

삶이 속수무책으로 슬프다는 걸 나이가 들면서 알아버리기 때문이구나.

우리 엄마도, 아침방송의 이름 모를 그 중년 배우도 그래서 갑자기 그렇게 눈물을 흘렸구나.


이제 알 것 같다.







9와 숫자들 <높은 마음> 듣기


9와 숫자들 「서울시 여러분」 앨범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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