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밴드 음악을 듣다보면 수십 수백번 들어온 곡이어도 한번씩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익숙한 노래 안에서 어떤 가사를 새로 발견할 때 그렇다. 세상엔 오직 자유로운 영혼만이 쓸 수 있는 가사들이 있다. 아이디어 자체가 재밌는 것도 있고 정서가 흥미로운 것도 있는데, 생각 나는 곡 세 개만 들어보면 이렇다.
1.
“우리는 자랑스런 인간이다.”
손잡고 떠나보자 세계여행
피부색깔, 말은 모두 틀려도
우리는 자랑스런 인간이다
다같이 노래하자 룩셈부르크
- 룩셈부르크, 크라잉넛
이 글을 읽고 계신 인간께 축하드린다. 인간인 것은 자랑스러운 이유가 될 수가 있는 거였다. 하다못해 우리는 자랑스런 한국인이다라거나, 뭐든 ‘우리는 자랑스런 OOO 이다’의 자리에 들어갈 말이 인간만 아니면 이렇게 놀랍지 않을 것이다. 저 자리에 ‘인간’을 넣을 수가 있다니 이것은 파격이다. 김성모의 “세계가 대충 망한 뒤”와 견줄 수 있는 수준이다.
‘피부색깔, 말은 모두 틀려도’에서 ‘틀려도’도 좋다. 여기에 ‘달라도’를 썼다면 나는 크라잉넛에 조금 실망하고 상당히 의심했을 것이다. 이 바닥엔 펑크밴드가 지능이 너무 높으면 그 자격을 박탈당하는 암묵적인 룰이 있다(응 없음 말고). 에밀 쿠스트리차를 좋아한다거나, 이미 펑크밴드로서의 정통성이 의심스러운 지적수준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던 그들이었다. 여기서 ‘달라도’라고 국립국어원이 고개를 끄덕일 맞춤법을 썼다면 나는 그들이 아무리 비둘기에게 술마시자고 하더라도 다 코스프레로 여겼을 것이다. ‘틀려도’를 썼기에 이 노래는 좀더 완성되었다.
나는 인간을 믿지 않는다. 이미 족발을 취했음에도 보쌈을 갈구하는 것이 인간이다. 잠깐 목을 뒤로 당기는 것으로 수십년 쌓아온 거북업보를 청산하고자 하는 염치없음이 인간이다. 하나 이 노래를 듣고 또 떼창을 하면서 나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조금(정말 조금) 회복하게 되었다. 우리는, 자랑스런, 인간이다.
2.
“이것이 사랑이라면 난 하지 않겠어요.”
당신을 처음 봤을 때 내 숨은 멎어버렸죠
산소는 충분했지만 알 수 없는 호흡곤란
이것이 사랑이라면 난 하지 않겠어요
- 이것이 사랑이라면, 구와 숫자들
이것이 사랑이라면 난 하지 않겠다니 대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보통은 이것이 사랑이라 설렌다거나 컴온베이비 널 갖겠어라거나 할 것이다. 근데 시작도 전에 도망칠 궁리부터 하는 그 마음이 황당해서 신선하다. 구와 숫자들의 초기 곡들엔 이 대책 없이 소심한 정서가 깔려있는데, 아래 곡도 같이 한번 보자.
함께 있어도 별들처럼 아득한 그대
스쳐가는 작은 말에도 난 숨을 죽이네
(…)
손을 잡아도 추억처럼 아련한 그대
이미 지난 작은 일에도 난 맘을 졸이네
말해주세요 그대도 저를 좋아하신다고
거짓말이래도 그게 중요한가요
- 말해주세요, 구와 숫자들
거짓말이래도 해달라니. 함께 있어도 별처럼 아득하다니. ㅋㅋ 아무튼 재밌는 형이다. 가사의 대부분을 쓰는 송재경은 정작 서울대 나와서 포스코건설 경영기획그룹 과장(설상가상 팀장으로 승진했다)을 하면서도 구와 숫자들 같은 훌륭한 밴드를 하는 형인데 저런 마이너 정서를 이해하다니 존나 기만자가 아닐 수 없다.
구와 숫자들은 훗날 “높은 마음으로 살아야지, 낮은 몸에 갇혀있대도” 같은 엄청난 가사를 쓰는 밴드가 된다. 이들의 가사는 지금이 더 좋다. 특히 <서울시 여러분> 앨범의 가사들은 정말 좋다. 그중에서도 ‘주부가요’는 꼭 들어보길.
3.
“인생은 금물 함부로 태어나지는 마.”
인생은 금물 함부로 태어나지는 마
먼저 나온 사람의 말이
사랑 없는 재미없는 생을 살거나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네
사랑도 금물 함부로 빠져들지는 마
먼저 해본 사람의 말이
자유 없는 재미없는 생을 살거나
죽을 만큼 괴로울지도 몰라
- 인생은 금물, 언니네이발관
“인생은 금물”이라니. 그러니 “함부로 태어나지는 마”라니. 어떻게 이런 가사를 쓸 수 있을까. 먼저 나온 사람이니까 하는 말이라지만 누구한테 얘기하는 걸까. 태아? 정자? 뭐가 됐든 이 형 말을 귀담아듣기 바란다(귀가 있다면). 이 세상은 녹록치 않고 특히 인간은 과대평가되었다. 먼저 나와봤으니까 하는 말이다. 인간은 잘 쳐줘야 고통이 반이다. 그러니까 차라리 혹등고래로 태어나자. 혹등고래는 월세 낼 필요도 없고 인스타 계정이 없어도 된다.
이 곡의 백미는 사실 마지막 소절이다. 저렇게 삐딱하게 인생은 금물이니 태어나지 마느니 한참 투덜거려도, 마지막엔 신화 속 예언처럼 이 모든 고통을 알고서도 너는 살아가고 사랑할 것이라고 얘기한다. “언젠가 우리 별이 되어 사라지겠죠”로 시작한 이 곡의 마지막은 이렇다.
그러나 너는 결국 말을 듣지 않고
어느 누군가를 향해서
별이 되어 주러 떠나게 될걸
크. 이석원쉑… 아무튼 멋있는 형이다. 에세이가 수십만부 팔리는 것도 그냥 생각 자체가 재밌는 형이니 그럴 수밖에. 돈 떨어질 때마다 이미 충분히 우려먹은 책 다시 우리지 말고 새 앨범으로 컴백하길 바란다. 장기하처럼 이제부턴 솔로 하면 혼자 먹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