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서양단(首鼠兩端) 고사
: 사마천 사기열전史記列傳 '위기무안후열전'
사기열전 '위기무안후열전'편은 외척세력이었던 위기후 '두영'과 무안후'전분' 그리고 장수 '관부' 세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마천은 이 편을 통해 한나라 황실 내부의 권력투쟁, 내부 모순을 세밀히 묘사하였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위기후 두영은 효문제의 황후 두태후의 사촌오빠아들, 즉 사촌 조카였습니다. 무안후 전분은 효경제 황후 왕태후의 배다른 동생이었습니다. 모두가 외척세력이었습니다. 이 시기는 한마디로 여인천하였습니다. 무슨 말씀이고자 하니 태후들이 섭정을 하거나 정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던 그런 시기였습니다. 효문제와 효경제는 앞에 효孝를 붙여줄 정도로 효가 지극했습니다. 이것은 거꾸로 그만큼 태후들의 입김이 막강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훗날 사마광은 그의 저서 '자치통감'에서 이 시기를 문경지치文景之治라고 하였으며, 조선 세종대왕도 문제와 경제 때를 태평성대로서 두 사람을 칭찬했습니다, 반면에 한무제는 진시황과 같이 비교를 하는 등 그의 폭정에 대하여 비판했습니다.
위기후 두영은 효경제3년 발생한 한나라 초기 최대 반란이었던 '오초칠국의 난'을 정벌하는데 대장군 주아부와 함께 위기후 두영은 전쟁의 선봉에서 반란을 제압하는 큰 공을 세웁니다. 이후 두영은 율태자의 태자부까지 되었다가, 태자가 폐위되면서 사직을 하였고 훗날 관부와 더불어 참형에 처해집니다. 두영과 정적 관계였던 전분은 승상이 되었는데 두영과 관부를 죽이는 데는 성공하지만 본인도 그로 인한 정신착란을 얻어 병들어 죽었습니다.
효경제가 죽고 한무제가 즉위한 건원 원년에 관부는 태복(왕명전달하던 관직)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관부가 고관대작들이 모인 잔치에서 전분에게 모욕을 주고 두태후의 친정동생 두보를 때리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관부는 성격이 강직하고 아첨을 모르는 장수였습니다. 무제는 두태후가 관부를 해할 것을 염려하여 연나라의 재상으로 보냅니다. 두영은 이런 관부를 잘 살펴주었고 두 사람은 관직을 잃었을 때도 아버지와 아들처럼 서로를 의지하며 잘 지냈습니다. 한상지만恨相知晩이라는 고사성어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는데요, '서로 너무 늦게 안 것을 한탄한다'는 뜻입니다. 좋은 사이 간에 일찍 만나지 못한 것을 얘기할 때 한상지만이라고 얘기합니다.
또 어느 날 전분이 주최한 연회에서 사건이 발생합니다. 전분이 얘기할 때는 모두 일어나서 화답을 하던 신하들이 두영이 일어나 얘기하자 몇 사람 일어나지 않고 귓속말로 자기들끼리 얘기하는 모습을 보고 관부는 폭발합니다. 결국 관부는 황제와 대신들이 있는 조정에서 그 잘못의 경중을 가리게 됩니다. 한무제가 신하들의 의견을 묻자 모두 우물쭈물 얼버무리는 태도를 취하였고, 무안후 전분의 측근이었던 어사대부(검찰총장급) 한안국韓安國도 명확한 대답을 피하게 됩니다. 중신들의 불분명한 태도에 실망한 무제가 자리를 뜨자 조의는 끝났으나, 전분은 화가 나서 한안국을 책망하며 말합니다, "그대는 어찌하여 구멍에서 머리만 내밀고 좌우를 살피는 쥐처럼 망설였소? 이 사건으로 두영과 관분을 제거하려 했는데 어찌하여 그렇게 애매한 태도를 취했는가"라고 따져 묻습니다. 여기에서 수서양단首鼠兩端 고사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한안국은 소인배처럼 행동한다며 전분을 비판하며 순리를 따를 것을 얘기하고 전분은 그에게 사과합니다. 얼마 후 한무제는 위기후 두영과 관부의 죄를 다루게 되었고, 관부는 가족과 함께 몰살당하고 위기후 두영 역시 음모를 받고 참해 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