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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언 Aug 12. 2021

복혜숙과 카페 비너스

한국영화 이야기 11.

배우 전지현이 독립군으로 나온 영화 <암살>(2015)을 보면 아네모네라는 이름의 카페가 등장한다. 아네모네라는 이름은 주요섭의 단편소설 「아네모네 다방」에서 가져왔다.      


소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방에 찾아와 하염없이 마담을 바라보는 학생에게 정절을 지키며 혼자 사는 마담이 마음을 열게 된다. 마담은 그 청년을 의식해 평소 하지 않던 귀걸이를 하고 잔뜩 치장을 한다. 하지만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그 청년은 어느 교수의 아내를 좋아하고 있었고 다방에 오면 들을 수 있는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이 마치 자기의 이야기인 양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마담을 하염없이 바라봤던 것도 마담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마담 뒤편 벽에 걸려 있는 모나리자 그림을 바라보며 이루어지지 못하는 짝사랑 여인을 그리워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마담은 다시 귀걸이를 빼게 된다.


엄앵란, 신성일 주연의 영화 <아네모네 마담>


소설 아네모네 다방은 배우이자 가수인 강석연이 운영하던 모나리자라는 다방을 모티브로 했다. 이 다방에는 모나리자 그림이 걸려 있었다. 다방 소설이라고 부를 정도로 다방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다수 등장했던 1930년대는 카페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했기에 유명 배우들이나 문인들이 다방을 운영했고 여배우를 마담으로 고용하여 장안의 인기를 끌기도 했다.      


요즘 배우라는 직업은 개런티를 많이 받는, 많은 사람들이 되고 싶어 하는 직업이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생계가 불안한 직업이었다. 영화 제작은 일 년에 고작 몇 편 안되다 보니 출연하는 영화도 적었고 연극 공연의 경우 개런티를 거의 받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많은 배우들이 레코드 녹음에 참여했다. 레코드 취입을 하면 용돈이라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랬다.      


 가정의 생계를 책임진 몇몇 여배우들은 부잣집의 후처로 시집을 가는 등 연예계 활동을 접고 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아리랑>(1926)의 여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신일선은 요즘 말로 국민 여동생이라 불릴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지만 불과 1,2년 활동하고 호남 부잣집의 후처로 시집을 가게 된다. 당시 일간신문에 신일선의 결혼에 장탄식을 하는 남성 팬들의 한숨 섞인 글이 실릴 정도로 그 충격이 컸다.

      

<세동무>에 출연한 복혜숙


당시 배우의 삶이란 경제적으로 힘들었다. 일부 여배우들은 경제적 독립을 위해 고정적인 수익을 낼 수 있는 카페 운영에 집중하기도 했다. 파고다 공원 정문 부근, 그러니까 종로에서 인사동 들어가는 입구 쪽에 비너스라는 다방이 있었다. 카페 한가운데 밀로의 비너스상이 자리하고 있었던 이 다방은 1930년대를 대표하는 다방이었다. 규모는 작아서 전시회나 집회를 열 정도의 규모는 아니었으나 다방을 운영하던 배우 복혜숙 때문에 유명했다. 복혜숙은 우리나라 최초의 배우 중 한 명으로 한때 영화 <농중조>(1926), <세동무>(1928) 등에 주인공으로 출연하여 인기를 끌었다.      


신파극 초기에는 여배우가 존재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이수일과 심순애”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장한몽> 같은 신파극에서 심순애 역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연기했다. 이처럼 신파극에서 여자 역을 맡은 배우를 여형 배우라고 불렀다. 1916년 톨스토이의 대표작 <부활>을 예성좌라는 극단에서 연극으로 만들었는데 그 작품은 여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카츄샤>라고 불렸다. 이 작품에서 여주인공 카츄샤 역을 맡은 배우가 고수철이라는 여형 배우였다. 고수철은 연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시기 고수철과 어깨를 나란히 한 이응수라는 배우도 당시 여형 배우로 유명했다. 그러던 중 대한제국 황실 상궁이던 마호정이 처음으로 무대에 섰다. 최초의 여배우였다. 이후 몇 명의 여배우가 등장했지만 이 중 비너스를 운영하던 복혜숙이 가장 널리 이름을 알렸다. 복혜숙은 일본에 유학했을 정도로 교육도 좀 받았고 남성들에게 못지않을 정도로 괄괄한 성격의 여장부였기에 당대 유명 인사들과 두루두루 교유했다. 그래서 비너스에 가면 복혜숙과 친분이 있는 문사들 배우들, 예술가들을 언제나 볼 수 있었다. 가끔씩 여운형 선생 같은 저명인사들이 와서 코코아를 마시고 가곤 했다.      


복혜숙의 회고록에 실린 비너스 다방 사진(동아일보 1981.5.12.)


영화 <암살>이나 박해일, 김혜수 주연의 <모던보이>(2008) 같은 일제강점기 카페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면 재즈밴드가 음악을 연주하고 그 음악에 맞춰 춤도 춘다. 영화 속에서 나오는 무도회장은 영화적 상상에 불가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경성에서 댄스홀은 금지되었다. 그래서 1937년 1월, 기생과 다방 마담, 그리고 레코드 회사 문예부장 같은 분들이 연서하여 “경성에 댄스홀을 허하라”라는 제목의 청원서를 당국에 제출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도쿄나 오사카 같은 곳에서는 댄스홀이 합법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지만 서울에서는 댄스홀이 불법이었다. 그래서 남촌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카페에서는 비밀리에 댄스파티가 열려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 청원을 주도했던 인물이 바로 비너스의 마담 복혜숙이었다. 복혜숙을 비롯해 각 권번 기생들은 경성 부내에 댄스홀을 설치하는 것이 어렵다면 영등포나 청량리 같은 경성부 외곽에라도 설치해달라고 청원했다. 1920년대 일본에서는 댄스홀 열풍이 불었다. 1930년대 초반에도 서울에서도 댄스홀을 설치해달라는 청원이 있었으나 총독부에서는 만주사변으로 시국이 어수선한 가운데 댄스홀은 어불성설일 뿐이라는 이유를 들어 설치를 불허했다. 그런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에 댄스홀을 설치하는 것은 영영 불가능해졌다.     


말년의 복혜숙


1937년 이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커피 수입의 어려움에 더해 카페 문화가 퇴폐적인 서양식 문화라는 이유로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복혜숙은 비너스의 단골이던 의사 김성진과 살림을 차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의 명물이던 비너스 다방의 운영을 그만두게 된다.      


해방 후 복혜숙은 가장 연륜 있는 배우로 활약했다. 1980년대 초반까지 스크린과 브라운관에서 볼 수 있었던 그녀는 평생 배우의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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