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에 ‘낙랑파라’라는 다방이 문을 열었다. 그 다방의 마담은 당대 최고의 인기 배우 김연실이었다. ‘낙랑파라’를 만든 이순석은 동경미술학교 도안과를 나왔다. 지금으로 치면 응용미술학과를 졸업한 것이다. 공예품을 비롯해 상품 디자인, 실내디자인 등을 아우르는 실용적인 미술을 공부했고 해방 후 서울대 미술대학이 설립될 때 응용미술학과를 만들어 후진을 양성했다.
카페 낙랑파라(1층)와 이순석의 아틀리에(2층)
이순석이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와서 동아일보사 강당에서 전람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화신백화점에 스카우트되어 백화점 쇼윈도의 배치, 광고 도안 등을 맡았다. 바쁘게 보내던 그는 백화점을 나와 독립을 꾀하게 된다. 지금 시청광장 남쪽에 있는 프라자호텔 뒤편에 2층짜리 건물을 임대하여 1층에 다방 낙랑파라를 만들고 2층에는 자신의 아틀리에를 설치했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인기 배우 김연실을 마담으로 고용했다. 김연실이 운영하던 낙랑파라는 큰 인기를 끌게 된다. 1935년 김연실은 다방을 직접 인수 후 이름을 낙랑으로 고쳤다.
카페의 이름에 낙랑이 들어가게 된 것은 디자인 콘셉트를 낙랑시대의 문물에서 가져왔기에 그랬다. 일제는 강점 이전부터 평양 인근의 낙랑유적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벌였다. 여기에 도굴꾼들까지 겹쳐서 낙랑시대 유물들이 쏟아지듯 나왔다. 그러다 보니 1920년대에는 일종의 낙랑 문화에 관한 붐이 일었다. 낙랑시대 유물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이순석은 다방을 만들면서 낙랑시대 유물들에서 인테리어의 콘셉트를 잡았다. 영업 초기의 사진을 보면 테이블이나 가구 등의 장식을 보면 낙랑 유물들에 힌트 얻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응접실이나 거실을 뜻하는 파라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이 당시 다방은 살롱을 겸하고 있어서였다. 실제 낙랑파라에서는 「시성 괴테」 백 년 기념제, 안석영의 영화 「춘풍」 축하회, 화가 구본웅의 개인전 등 각종 행사가 열렸다.
일제강점기 낙랑 고분 문양을 콘셉트로 제작된 접시
비너스의 운영자 복혜숙은 초창기 여배우로 알려져 있었으나 가장 인기 있던 배우는 아니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 사이 대중에게 가장 큰 인기를 끌었던 배우는 김연실이었다. 그녀는 1927년 나운규가 만든 <잘 있거라>에 출연하며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세동무>, <종소리>, <철인도>, <승방비곡> 등에 출연하면서 당시 최고의 여배우로 등극하게 된다. 특히 외모가 귀엽고 노래도 잘 불러 여기저기서 상사병에 빠진 남성들의 아우성이 터져 나올 정도였고 여러 차례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회자되기도 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 인기 있는 여배우들 역시 스캔들에 시달렸다. 배우들이 매니저를 통해 관리받는 시대가 아니다 보니 아무리 유명한 배우라고 해도 카페나 극장, 길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일거수일투족이 대중들의 레이더망에 잡혔고 거기에 사생활 보호라는 개념도 없었기에 배우들의 가십성 기사들도 자주 보도되었다. 특히 엄청난 인기에도 불구하고 결혼도 안 하고 있던 김연실의 연애 문제는 대중들이 흥미 있어하는 이야기 중의 하나였다. 그러다 보니 1939년 소설가 김동인이 타락한 신여성을 비판하는 소설을 썼는데 그 제목을 “김연실전”이라 붙였을 정도였다. 물론 제목만 "김연실전"이라 붙였을 뿐 배우 김연실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배우 김연실
카페 낙랑은 카페 비너스와 마찬가지로 중일전쟁 발발 이후 문을 닫았다. 일제 말기 김연실은 만주에서 생활하다가 해방 후 서울로 돌아와 다시 낙랑의 문을 열었다. 과거 문화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던 낙랑이 다시 영업을 시작하자 과거의 단골들은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좋아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터지고 김연실이 북한으로 가면서 서울의 명물 낙랑은 사라지게 된다. 북한에서 김연실은 1990년대까지 배우로 활동하며 인민배우 칭호를 얻었다. 그의 동생은 촬영 감독 김학성이었으며 김학성의 부인이던 배우 최은희가 올케였다. 가수 김계자는 남한에 남겨둔 딸로 한국전쟁때 헤어져 다시 만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