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철동에 자리한 우미관과 전설적인 주먹 김두한은 빼놓을 수 없는 인연이 있다. 당시 극장은 폭력배들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 영화관 입구에 표를 받는 곳을 기도라고 하는데 보통 그 지역의 폭력배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김두한은 한때 우미관의 기도로 있으며 조선인 주먹의 대표로 군림했다.
예전에는 유흥가의 중심지에 극장이었으며 폭력배들은 극장에서 일을 봐주면서 주변 상점들에 보호비를 받는 등 그 지역의 이권을 차지했다. 이건 사실 일본식 문화였다. 야쿠자들과 극장은 아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고 이런 식의 관행이 조선에도 그대로 반복되었다. 일제강점기 경성을 주름잡았던 야쿠자들은 대개 극장을 그 근거지로 활동했다.
김두한
아이러니하게도 폭력배들과 경찰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극장에서는 공연 중 허가되지 않은 말이 오가는 것을 막기 위해 경찰이 모든 흥행물들을 현장에서 검열했다. 이것을 임검이라고 했다. 임검 순사는 서류로 제출한 내용과 다른 이야기를 배우 혹은 변사가 언급할 경우 언제든 공연이나 영화 상영을 중지할 수 있었다. 조선어가 오가는 조선인 극장에서는 조선인 경찰들이 주로 임검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극장 업자들과 경찰과의 유착관계가 있었다. 당연히 극장에서 기생하던 폭력배들도 경찰의 비호를 받았다. 그러다보니 약초극장과 관련했던 홍찬은 해방 후 친일경찰 노덕술을 숨겨주다가 반민특위에 기소되기도 했다.
김두한은 청계천 변의 광교나 수표교 밑에서 생활하던 고아들과 어울리며 유년기를 보냈다. 자연히 불량배가 되었고 우미관에 들어가 기도를 봤다. 그리고 일제말기에는 폭력배들을 모아 친일단체인 ‘반도의용정신대’를 조직하여 종로를 중심으로 한 조선인 주먹의 왕좌에 올랐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장군의 아들>(1989) 같은 영화를 보면 일본인 야쿠자들에 대항하는 민족주의적 인물로 그려지는데 실상은 그렇지만은 않았다.
일제강점기 경성의 암흑가는 일본인 야쿠자들이 장악했다. 1920~30년대는 경성극장을 배경으로 한 와케지마 슈지로가 주도했다. 1930년대 중반부터는 명치좌를 중심으로 활약한 시미즈쿠미(淸水組)가 경성 암흑계의 왕좌에 있었다.
시미즈쿠미를 이끌었던 인물은 하야시라는 이름으로 영화나 드라마에 보면 김두한의 라이벌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일본인이 아니라 본명이 선우영빈인 조선인이었다. 어려서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일본 우익의 거두 도야마 미츠루에게 발탁되어 야쿠자가 되었고 조선으로 돌아와 경성 암흑계를 주도하였다. 당시 경성의 주먹계에서 선우영빈은 두목이었고 명치좌의 영향 하에 있던 우미관의 기도를 보던 김두한은 그의 부하였다.
명치좌
김두한이 서울의 암흑가를 장악한 건 해방 후 이야기이다. 해방이 되고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정리해 본국으로 돌아갔다. 야쿠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인들의 재산은 적국의 재산, 다시 말해 적산이라고 해서 몰수되었기에 그전에 자신들이 데리고 있던 조선인들에게 명의를 넘겨주어 조금의 재산이라도 건지려고 했다. 경성 제1의 야쿠자 조직인 시미즈쿠미는 조직을 선우영빈에게 넘기고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렇게 해방 직후 서울의 암흑가는 선우영빈의 손안에 들어왔다.
그러던 상황에서어마어마한 마약사건이 터진다. 일제 말기에 일본군이 전시에 진통제로 사용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아편을 군수창고에 보관하고 있었다. 해방이 되자 일본군이 그 마약을 빼돌리게 되는데 그것을 선우영빈이 인계받아 약초극장 인근 다방 지하에 숨기고 지하실 문을 시멘트로 발라 아편을 유통할 수 있는 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이 무렵 서울시내에 아편이 크게 유통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거물급 야쿠자 사고야 토메오가 서울에 머물면서 중국으로 보내려던 아편 5톤을 경성에 풀어버렸던 것이다. 그는 1930년 당시 일본 수상을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10년을 복역하다 출소한 인물이었다. 그가 풀어버린 아편으로 서울 거리에 아편이 넘쳤고 군정경찰에서는 소위 마약과의 전쟁을 벌이게 된다. 미군 역시 일본군이 보관하고 있던 아편 8.5톤이 사라진 걸 알고 군수품 책임자인 일본군 헌병대 대위 노다를 체포한다. 노다는 자신이 빼돌린 아편의 유통을 선우영빈에게 부탁했단 내용을 실토했다.
당시 암흑가의 고문 격으로 김동열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이 사람이 자진해서 특무대에 자수하여 들어왔고 김동열을 통해 선우영빈 역시 자수했다. 하지만 마약과 관련한 모든 죄를 뒤집어 쓸 것 같은 분위기가 펼쳐지자 선우영빈은 감시하던 눈을 피해 경찰서를 탈출했다. 그에게는 1만 원의 현상금이 붙은 채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 결국 1946년 5월 체포되었고 그가 거느리고 있던 조직은 와해되었다.
선우영빈이 감옥에 들어가 있는 사이에 김두한이 좌우 정치권과 손을 잡으며 서울의 암흑가를 장악하게 된다. 특히 그는 자신이 청산리 대첩으로 유명한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면서 해방된 서울에서 독립운동가의 대우를 받게 된다. 한때 좌익 쪽에 서기도 했던 그는 김좌진 장군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를 알게 되면서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백색테러를 주도했다. 결국 미군정에 체포되어 사형 언도를 받기도 했으나 반공을 앞세우던 시절인지라 다시 자유인이 되었다. 그는 자유당 정권과 박정희 정권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국회의원으로 있었으며 영화와 드라마, 소설의 주인공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김두한 이전 서울의 암흑가를 장악했던 선우영빈은 감옥에서 나와서 일본 야쿠자의 자금으로 건설업을 시작해 크게 성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