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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언 Sep 26. 2021

해방 전후의 행적

무성영화 시대스타 김연실 4편

김연실 악극단의 포스터와 전단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전시라 생필품이 배급되던 와중에 커피와 같은 수입 사치품을 판매하는 끽다점은 당국의 눈치를 보기 딱 알맞은 업종이었다. 어린 동생도 다 커서 누나 손을 떠났다. 1938년 가을 사실혼 관계에 있던 이기승이 전쟁터로 떠나게 되면서 결혼에 대한 미련은 사라졌다. 서울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조선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녀가 인생을 걸었던 낙랑을 정리했다. 김연실이 사라진 서울에는 그녀가 천진 혹은 만주 신경의 빠에서 여급으로 나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김연실이 찾은 곳은 만주국의 신경이었다. 그곳에서 스탠드바를 열었다. 낙랑 시절 배웠던 솜씨로 손수 음식을 만들어 팔았지만 매달 적자였다. 어쩔 수 없이 스탠드바를 접고 매달 180원의 봉급을 받고 하얼빈의 어느 홀에서 노래를 불렀다. 남에게 맡겨 놓은 아이가 걱정되어 매주 하얼빈과 신경을 왕복하는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아이가 병을 얻게 되자 하얼빈에서의 생활은 접었다. 다시 신경에 자리 잡아야 했다. 김연실이 팔아버린 스탠드바는 그사이 크게 번성해 있었다. 그곳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스탠드바가 번창하면서 신경에서 김연실의 인기도 덩달아 높아졌다. 김연실은 자신의 이름을 앞세운 소녀 가극단을 만들어 신경은 물론 북경에까지 가서 공연을 펼쳤다. 


신경에서 김연실의 가극단이 인기를 끌자 1939년 여름, 만주영화협회(약칭 만영)에서는 김연실에게 소위 황군 위문단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연실은 가극단을 인솔하여 북지 각 전선으로 다니며 조선 노래와 무용을 공연했다. 전쟁터에서 생사의 기로에서 긴장한 생활을 하던 일본군은 김연실이 이끄는 가극단에 열광했다. 여름 한철 북지 전선을 한 바퀴 돌아 신경으로 복귀해 보니 북지 각 전선에서 김연실에게 보낸 감사의 편지가 한가득이었다. 


북지 순회공연의 성공적 성과와 김연실의 대단한 인기를 확인한 만영에서는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다. 자연 만영에서 주목하는 배우가 된 김연실은 영화배우로 활동하던 시절이 생각날 때면 마차를 달려 자주 만영으로 갔다. 넓은 보도가 쭉 뻗은 그곳을 지날 때면 <잘 있거라>를 찍기 전 나운규와 함께 보았던 <카츄사>가 생각났다. 


만영에는 고향을 떠나온 비슷한 처지의 배우들이 많았다. 만영을 왕래하던 김연실은 이향란(李香蘭)과 이명(李明) 등 만영의 스타들과 사귀기 시작했다. 촬영소 뒤편 기숙사 뜰 앞에서는 자주 이야기꽃이 피었다. 


김연실은 이들 만영의 여배우들과 대화를 나누며 자주 답답함을 느꼈다. 그나마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이향란은 일본어가 능통했기에 이야기가 통했다. 그러면서 미모가 뛰어나지 않은 이향란이 누구보다 큰 인기를 얻는 원인이 교양에서 우러나오는 자신감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만영의 배우들과 어울리면서 자연 고향의 친구들 생각이 났다. 


이 무렵 고려영화협회의 촬영팀이 <복지만리>를 촬영하기 위해 신경에 왔다. 김연실은 그립기만 했던 친구들을 만날 생각에 소녀처럼 들떴다. 김연실은 앞장서 조선에서 온 촬영팀을 안내했다. 이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고려영화협회에서 <복지만리> 촬영을 계기로 극단 고협을 조직하기로 했다며 김연실도 참여해 달라고 했다. 낯선 만주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사는 것보다는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뜻 고협에 합류하기로 했다. 다시 신경에서의 생활을 정리했다.


막상 신경을 떠나려니 미련이 남았다. 이곳에서 함께 살림을 꾸리게 된 미술가 김혜일 때문이었다. 카프 출신인 그는 신경의 만선일보사에서 삽화가로 근무하고 있었다. 고향이 수원인 그는 같은 고향 출신 김연실과 금방 친해졌고 낯설고 외로운 처지를 함께 나누었다. 김연실은 김혜일에게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서울로 향했다.


1940년 서울로 돌아온 김연실은 고협에 입단하여 고협촌에 짐을 풀었다. 고협은 홍제동에 고협촌이란 이름의 마을을 마련해 집단생활을 하며 공연과 노동을 함께 하고 있었다. 김연실은 4월 고협에서 공연한 <춘향전>에서 월매 역을 맡아 호평을 얻었다. 


고협촌에서의 집단생활은 인기가 많고 자유롭기만 한 그녀에게는 번거롭기만 했다. 7월에는 고협을 나와 평양으로 갔다. 평양 금천대좌 직속의 노동좌와 손잡고 김연실의 이름을 딴 쇼를 만들었다. 당시는 창씨개명을 강제하던 시기라 창씨명은 가네이(金井), 새로운 이름은 자신의 이름 실자와 평양 금천대좌에서 글자를 따와 미치요(實千代)로 지었다.


정신없이 바쁘게 활동하고 있었지만 외로웠다. 어느 틈에 뱃속에는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김혜일이 있는 만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김혜일과 함께 사는 것이 그 어떤 것 보다 행복할 것이라 믿었다. 다시 신경으로 돌아온 김연실은 김혜일과 살림을 합쳤다. 행복한 날들이었다. 김연실과 김혜일은 해방 전까지 딸 둘을 키웠다. 이중 큰 딸이 6.25 전쟁 이후 미군부대 가수로 활약하며 명성을 얻은 김계자였다.


해방이 되었다. 관동군의 본거지인 신경은 아수라장이었다. 김연실과 김혜일은 서울로 갈 채비를 서둘렀다. 신경에 정착할 때는 아이와 단둘이어서 단출했지만 서울로 돌아갈 때는 가족이 늘어 함께 움직이기가 더딜 수밖에 없었다.


1946년 서울로 왔다. 서울에 온 김연실은 과거 서울의 명물이던 끽다점 낙랑을 다시 재건하기로 한다. 장소는 원래 있던 소공로(장곡천정)가 아니라 일본인들이 돌아가 한산한 명동(명치정)으로 정했다. 명동은 조선의 문화예술인들이 모이는 만남의 장소였다. 그곳에 낙랑을 위시하여 여러 개의 카페가 새롭게 들어섰다. 예전 낙랑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새로 개장한 낙랑에 들어와 김연실에게 반가움을 표했다.


남편 김혜일은 천주교에서 발간하는 《경향신문》의 사회부 기자로 입사했다. 1946년 10월 창간한 《경향신문》은 소설가로 유명한 염상섭이 편집인이었다. 1930년대 말 염상섭은 《만선일보》의 편집장을 역임하며 김혜일과 함께 근무한 적이 있었다. 또한 《경향신문》에는 시인 정지용이 주간으로 있었다. 구인회 동인이던 정지용은 낙랑의 단골이었다. 사실 낙랑은 과거 구인회가 탄생한 장소였을 만큼 정지용과는 인연이 깊은 곳이었다. 이러저러한 인연들이 엮어져 낙랑의 바깥주인 김혜일이 《경향신문》에 자리 잡게 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5MW1k69VT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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