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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언 Sep 25. 2021

남장배우 혹은 카페 마담

무성영화시대 스타 김연실 4편

영화 "종로"에 출연한 나운규와 김연실


1932년 이규환은 <임자 없는 나룻배>로 연출 데뷔를 할 참이었다. 무명의 영화감독이 조선의 스타들을 자신의 영화에 출연시키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규환은 제작자를 통해 나운규를 만날 기회를 얻었다. 그는 나운규에게 시나리오를 한번만 읽어 달라고 부탁했다. 시큰둥한 표정의 나운규는 며칠 후 머리를 박박 깎고 나타났다.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었고 자신이 맡은 배역을 위해서는 머리를 박박 미는 편이 어울릴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그리고서는 자신은 이미 캐릭터 분석까지 마쳤고 영화에 필요한 배우들까지 직접 나서 캐스팅 하겠다고 했다. 이규환은 조선 최고의 스타가 발벗고 나서주는 것에 대해 너무 감동 받았다.    

  

<수일과 순애> 이후 주로 무대에서 활동하면서 레코드 취입으로 조선과 일본을 바쁘게 오가던 김연실은 나운규의 부탁으로 <임자 없는 나룻배>에 출연하게 된다. 김연실이 맡은 역은 주인공 춘삼의 아내 역이었다. <임자 없는 나룻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농부 춘삼(나운규 분)은 수해를 입어 먹고 살 수 없게 되자 도시로 와 인력거꾼이 된다. 입원 중인 아내(김연실 분)의 병원비를 위해 남의 물건에 손을 대어 감옥에 가게 되고 그 사이 아내마저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게 된다. 어린 딸(문예봉 분)과 시골로 내려간 춘삼은 뱃사공이 되어 삶을 이어가지만 나룻터에는 철교가 만들어지고 다리를 놓으러 온 측량기사(임운학 분)가 어린 딸을 겁탈하게 된다. 분노한 춘삼은 도끼를 들어 측량기사를 살해하고 철교를 지나는 기차를 향해 뛰어든다.     


영화가 공개되자 <아리랑>에 비견되는 좋은 평가가 이어졌다. 아역으로 등장한 문예봉이 큰 주목을 받았고 김연실에 대해서도 “베스트의 연기를 보여주었다.”는 극찬이 쏟아졌다. 영화인으로 한물갔다는 평가를 받던 나운규는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듯 보였다.      


나운규프로덕션이 문을 닫은 후 나운규는 재기를 위해 노력했다. 1930년 원방각사에서 제작한 <철인도>를 연출한 이후 경성극장의 운영자인 흥행사 와케지마 슈지로의 휘하에서 영화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일본인 영화제작자 도야마 미츠루와 손잡고 그의 밑에서 영화제작을 추진했다. 처음 만들어진 영화가 도야마가 만든 <금강한>이었다.     


나운규가 <금강한>에 출연하자 대일본국수회 소속의 영화인이 만든 영화에 출연했다는 이유를 들어 나운규에 대한 조선영화인들의 비난에 가까운 질책이 쏟아졌다. 화들짝 놀란 나운규는 다음 작인 <남편은 경비대로>에는 출연하지 않고 대신 이필우, 배구자 등과 함께 신무대에 참여하여 연쇄극을 만들었다. 김연실 역시 나운규가 이끄는 신무대에서 제작한 <록사노와 시라노>, <암굴왕>과 같은 연쇄극에 출연했다. 

     

연쇄극 제작을 잠시 멈추고 <임자 없는 나룻배>의 촬영에 참여한 나운규와 김연실은 곧이어 대구영화사에서 만드는 <종로>에 출연하게 된다. 나운규가 원작, 각색을 하고 양철이 연출한 이 영화는 가난한 청년 도성과 목사의 딸 정순의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이야기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성(나운규 분)은 정순(김연실 분)을 사랑하지만 경제적 이유로 헤어지게 되고 북쪽으로 방랑의 길을 떠난다. 그 사이 정순은 도성의 친구인 부자 세창과 결혼하지만 세창이 망하게 되면서 정순은 카페의 여자가 된다. 돈을 벌어가지고 돌아온 도성은 정순이 일하는 카페를 드나들며 돈을 물 쓰듯 쓰고 돈이 다 떨어졌을 무렵 정순은 어디론가 떠나고 만다.      


이렇듯 <종로>는 배금주의에 대한 허무함이 가득한 작품이었다. 영화는 완성되었으나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여러 군데를 삭제 당하고 나서야 공개될 수 있었다. <임자 없는 나룻배>의 감독 이규환은 김연실의 연기에 대해 자포자기 상태가 된 여자의 고달픈 모습을 잘 연기했다고 평했다.      


이즈음 김연실은 김광주가 만든 <아름다운 희생>에 단역으로 출연했고, 안종화가 연출한 <청춘의 십자로>에서는 수하물 담당으로 일하는 주인공을 사랑하는 발랄한 모습이 인상적인 가솔린걸로 출연했다. 당시 《매일신보》에는 김연실에 대해 “어느 때나 처녀 역으로 순진하고도 수줍어하는 역을 제일 잘하여 그 복성스럽고 둥근 얼굴에는 항상 웃음을 띠우고 있어 봄철의 먼 산 아지랑이를 바라보고 꽃다운 인생의 봄을 그리고 있는 듯한 얼굴”이라고 평했다. 이시기 김연실은 자타공인 조선영화를 대표하는 여배우였다.     


나운규가 이끌던 신무대에 참여하면서 영화 출연과 레코드 취입으로 바쁘던 김연실은 나운규의 곁을 떠나 경성촬영소의 전속 배우로 옮겨갔다. 당시 수입이 없던 신무대는 김연실이 레코드를 취입해 번 돈으로 끼니를 이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열악했다. 김연실은 보다 안정된 생활이 필요했다.  

    

당시 도야마와의 관계를 청산한 와케지마는 조선인들이 즐길 수 있는 영화를 제작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이필우와 손을 잡았다. 이필우가 경성촬영소의 촬영소장으로 합류하면서 영화사의 조직이 정비되었다. 와케지마 휘하의 경성촬영소에는 이미 이필우의 동생 이명우를 비롯해 조선영화인들이 포진해 있었다. 이들은 도야마가 영화촬영소를 만들었을 때 시대극을 제작하기 위해 섭외된 인물들로 1931년 신흥푸로덕션이라는 이름으로 <방아타령>을 만든 바 있었다. 경성촬영소가 재출발을 시작하면서 조선의 여배우 중 가장 큰 인기를 끌고 있던 김연실도 이때 전속 배우로 스카우트되었다.      


경성촬영소에 스카우트 된 김연실은 중요한 역들을 도맡았다. 일본인 감독 김소봉이 만든 <전과자>에 출연했고 이어 <대도전>과 <홍길동전>에 연이어 출연했다. 1934~35년 사이에 경성촬영소에서 만든 중요한 영화들에서 주인공은 대부분 김연실이었다. 

     

이중 윤백남 원작, 이명우 연출의 <홍길동전>은 김연실이 남자배우가 해야 할 주인공 홍길동 역으로 출연한 특이한 작품이었다. 경성촬영소의 경영자 와케지마는 잘 알려진 작품들 속에서 여배우에게 남자주인공 역을 맡겨 보다 신선한 느낌을 불어 넣으려 했다. 그러면서 조선 여배우 중 가장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김연실이 홍길동 역을 맡는다면 그보다 흥미로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홍길동 역을 맡으라는 지시를 받은 김연실은 난감했다. 활극배우로 유명한 이원용과 함께 연기하면서 승마나 낙법 등을 배우긴 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남자 주인공 역을 여자배우가 맡아 하는 것이 영화를 우습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본질적인 의문이 들었다. 걱정이 된 김연실은 나운규를 찾아가 이 소식을 알렸다. 나운규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듯 바라봤다.   

   

“홍길동, 홍길동! 전반은 문제없지. 그런데 후반이 걱정이야. 그러나 할 수 있소. 말은 탈줄 안다니까, 칼 쌈 하는 것을 배워야 하겠군. 내가 지도해 주지…”     


나운규는 미소를 지으며 김연실을 격려 해주었다. 홍길동 역을 김연실이 연기한다는 것에 대한 호기심 같은 것이 생긴 듯 했다. 나운규는 처음 맡게 되는 남자 역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관해 이야기 하며 캐릭터 분석과 분장까지 지도해 주었다.   

   

시간이 흘러 영화가 완성되었다. 시사회가 열리는 날 시사회장을 찾은 나운규는 영화가 끝나자 김연실을 찾아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연실이가 남자 역을 다하니 내 뒤를 물려받았군. 이리 뛰고 저리 뛰게…”    

 

나운규는 크게 웃었다. 활극배우로 이름 높은 나운규가 봐도 연기가 만족스러웠다. 이즈음 잡지에 김연실, 석일량, 강석연의 삼각 스캔들이 보도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마음에 품고 있는 남자는 따로 있었다. 수많은 남성들의 유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이기승라는 청년이었다. 휘문고보를 다니면서 김연실에게 열렬한 구애를 했다. 둘은 열렬히 사랑했고 결혼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배우와 결혼하려는 아들이 마땅치 않았던 그의 부모는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둘 사이가 멀어질 것이라 생각하고 이기승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다. 이기승이 해외에 있는 동안 김연실과 300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워 나갔다.  1935년 이기승이 조선에 돌아왔다. 둘의 마음은 여전히 뜨거웠다. 더 이상 그의 부모도 말릴 수 없었다. 


경성촬영소의 기술을 책임지고 있던 이필우는 토오키 영화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조선영화에 대해 많은 지원을 해온 단성사라면 토오키 영화의 제작도 맡아 할 것이라 생각했다. 우선 조선인이 가진 기술로 토오키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이필우는 단성사 측과 약속 후 토오키를 소개하는 예고편을 만들어 그것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휘하에 거느리고 있는 기술자들과 예고편을 촬영했다. 촬영이 끝나고 편집과 현상까지 마쳤다. 필름을 영사기에 걸고 상영을 시작했는데 소리가 맞지 않았다. 촬영을 맡은 최운봉은 자신은 제대로 촬영을 했는데 왜 안 맞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다가 편집을 잘못한 게 아니냐며 볼멘소리를 냈다.     


이필우의 동생인 촬영기사 이명우가 영사기를 살펴보았다. 소리를 감지하는 램프가 화면을 영사하는 램프와 20프레임 차이가 나는 곳에 있었다. 사운드필름과 화면을 다시 조정 해 프린트를 만들어 상영해 보니 소리가 딱 맞았다. 이필우는 필름을 들고 단성사로 달려갔다.     


단성사에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극장주들이 모여 있었다. 예고편을 영사기에 걸고 틀었다. 스크린 속 화면과 소리가 딱딱 들어맞았다. 여기저기서 경탄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박승필 사후 단성사를 운영하고 있던 박정현은 영 미덥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우미관 영사기사 출신인 박정현은 이필우에게는 영사기사 스승이기도 했다. 이필우는 스승 앞에서 영화 녹음을 직접 시연해 보여주겠다며 김연실을 극장으로 데리고 오라고 했다. 김연실이 올 동안 녹음 준비를 마쳤다. 단성사로 달려온 김연실에게 이필우는 <아리랑>을 부르게 하고 바로 촬영과 녹음을 시작했다. 촬영이 끝나자 이필우는 다음 날 이곳에서 녹음까지 된 필름을 영사하겠노라고 알렸다.   

   

하루가 지났다. 호기심어린 눈빛의 사람들이 단성사로 모여들었다. 이필우는 전날 녹음하여 현상까지 마친 필름을 영사했다. 노래를 부르는 김연실의 모습과 노랫소리가 영사기 속에서 흘러나왔다. 조선극장의 운영자 미나도(港)가 대단하다고 추켜세웠지만 박정현은 큰 비용이 드는 토오키 영화를 제작할 마음이 별로 없었다. 결국 첫 번째 토오키영화는 단성사가 아닌 이필우가 소속된 경성촬영소에서 제작이 시작된다.     

 

김연실이 주인공 역을 맡은 <홍길동전>이 완성된 직후 경성촬영소에서는 토오키 영화 <춘향전>을 준비했다. 김연실의 <홍길동>이 큰 성공을 거둔 탓에 경성촬영소 측에서는 <춘향전> 역시 남녀주인공 모두를 여자배우들이 맡도록 했다. 김연실에게는 이몽룡 역을, 춘향 역에는 <임자없는 나룻배>에서 김연실의 딸 역을 맡았던 문예봉이 캐스팅 되었다. 김연실은 홍길동에 이어 이몽룡까지 남자 주인공역을 연이어 맡게 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컸다. 나운규에게 조언을 청했다. 나운규는 “련실이의 홍길동은 귀엽게 볼 수 있으며, 춘향과 더불어 사랑을 이야기하는 이도령 또한 귀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악치 수령 남원 부사를 처단하기에는 약할 것이다.”라며 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김연실의 생각도 나운규와 같았다. 

    

어떤 역이든 마다하지 않던 김연실은 <춘향전>에서만은 빠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시에론레코드와의 전속 계약을 이유로 들어 주인공인 이도령 역 출연을 고사하고 농촌 아낙이라는 단역을 맡아 연기했다. 오랜만에 만난 문예봉은 어른이 되어 있었다. 촬영이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자 김연실은 일본으로 건너가 음반을 취입했다. 김연실이 일본으로 가버리자 촬영도중 사라진 그녀에 대해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악의적인 소문들이 퍼져나갔고 경성촬영소에서 퇴출된다. <춘향전> 이후 경성촬영소에서 김연실이 맡았던 역할은 문예봉이 대신하게 된다. 문예봉은 <춘향전> 이후 제작된 <아리랑고개>에서 남자 주인공인 칠성 역을 맡아 연기했다.   

   

경성촬영소에서 나온 김연실은 이기승과의 결혼을 준비하며 영화출연을 자제했다. 이기승의 집안에서는 영화배우와 결혼하는 것에 대해 끝끝내 찬성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지방에서 몇 개월간 이어지는 촬영은 부담이었다. 그래서 영화 출연보다는 자신이 인수한 끽다점 낙랑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김연실이 인수한 낙랑의 원 주인은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이순석이었다. 그는 1931년 경성부청에서 조선은행 방향으로 난 장곡천정길 초입에 끽다점 낙랑파라를 개업했다. 이즈음 평양일대에서 낙랑 고분들이 발굴되어 화제였는데, 낙랑파라는 낙랑고분의 문양들에서 모티브를 얻어 내부를 장식한 것이 특색이었다.     


낙랑파라의 주인 이순석이 미술인이다 보니 낙랑파라를 찾는 이들 대부분이 미술을 하는 청년들이었다. 그러던 것이 1932년 김연실이 낙랑파라의 마담으로 데려오면서 김연실과 친분이 있는 연극, 영화인들로 손님들이 바뀌었다.     


김연실은 배우라는 이유로 결혼이 미루어지게 되자 결혼 보다는 배우로 평생을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영화배우로 자기의 길을 개척해 나가려면 먼저 생활이 안정되어야 했다. 종래 여배우의 불운한 처지는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것에 있다는 점을 너무 잘 알았다. 생활의 안정을 구하기 위해 낙랑파라의 마담이자 배우로 활약하던 김연실은 1936년 아예 그곳을 인수하여 이름도 낙랑파라에서 낙랑으로 바꾸었다.

      

김연실이 인수한 낙랑에는 엔리코 카루소나 후지와라 요시에의 성악곡이나 서양의 민요, 무용곡들이 주로 흘러나왔다. 경성의 문화인들에게는 아지트와 같았던 이곳에서는 1932년 괴테 서거 100주년을 맞아 30여인의 문사가 모인 가운데 ‘시성(詩聖) 괴테’ 백년기념제와 안석영 연출의 <춘풍(春風)> 영화 축하회도 열렸다. 이 밖에 여러 시인들의 시집출판기념회와 구본웅의 개인전을 위시하여 여러 미술가들의 전람회, 제국대학 학생그룹의 만돌린 연주회도 그곳에서 개최되었다. 이렇듯 김연실의 낙랑은 경성의 카페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 장소였다.  

   

영화배우로 살길 원했던 김연실은 영화배우와 결혼을 반대하는 이기승의 집안으로 인해 괴로웠다. 결혼은 계속 미루어졌다. 결혼을 포기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임신을 하게 되었고 아이를 낳았다. 이 무렵 영화출연이라고는 친분이 있던 영화감독 김유영이 연출한 <애련송>에서 주인공 남숙(문예봉)의 친구 가운데 한 명으로 출연한 것이 유일했다.     


<애련송>에 출연하여 김유영과의 우정을 표시한 것 이외에 토월회 출신인 심영, 박제행, 서월영 등과 함께 1935년 설립된 동양극장 청춘좌의 창단맴버로 이름을 올렸다. 이렇듯 김연실은 과거 인연이 있는 동료들과 어울리는 수준을 크게 넘지 않는 상태로 미미한 활약을 이어갔다. 그녀의 관심은 아이를 키우는 것과 낙랑을 보다 충실히 운영하는 것 두 가지였다. 


https://youtu.be/UEMAAkkkOj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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