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할 듯 우악스럽다. 어제까지 멀쩡했던 건물도 포탄에 맞아 부서지기 일쑤이다. 망가지는 것은 건물만이 아니다. 사람까지도 전쟁이 만들어 낸 폐허 속에 조금씩 무너진다.
폭풍 같은 전쟁의 소용돌이가 휩쓸고 간 자리는 잔해만이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연이 걷힌 잔해의 틈을 비집고 새싹이 튼다. 새롭게 머리를 내민 싹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새로운 풍경을 보여준다.
제1차 세계대전이 꼭 그랬다. 징집을 피해 스위스 취리히에 모인 유럽인들은 "카바레 볼테르"에서 말도 안 되는 시를 노래하고 새로운 문학과 예술을 실험했다. 전쟁이 끝난 후 각기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폐허의 땅에 “다다”라는 새로운 싹을 틔었다.
대학시절 김미혜 선생님의 연극사 수업에서 다다이즘에 대해 발표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발표를 위해 이것저것 자료를 찾아 보면서 다다이즘이 탄생한 카바레 볼테르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와 같은 공간을 만들어 보고도 싶었다.
한참의 시간이 훌쩍 지나 카페를 열 기회가 생겼다.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마정리 마정낚시터 인근에 3층짜리 카페 건물을 매입해 북카페 형태의 책방을 내기로 했다. 드디어 내가 마음속에 두고 있던 이름, “카바레 볼테르”를 사용할 시간이 온 것이다.
2022년 5월 오픈 예정인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마정리에 자리한 "책방 노마만리"
주변 사람들에게 카페 이름으로 "카바레 볼테르"가 어떤지를 물어 보았다.내 예상과 달리 다들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중 고등학생 아들은 “카바레”가 뭐냐고 물었고 아내는 “쟈딕 앤 볼테르”라는 브랜드를 연상시킨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도 1980-90년대 극장식 스탠드바를 연상시키는 “카바레”라는 단어가 주는 선입견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볼테르가 커피를 사랑해 하루에 40-50잔씩 마셨다는 이야기를 강조하며 볼테르와 커피의 상관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일종의 절충으로 “카바레 볼테르”를 대신해 “카페 볼테르”는 어떤지 물었지만 반응은 매한가지였다.
정해둔 이름에 대해 주변에서 별로라고 반응하는 것이 묘하게도 자존심을 긁어 댔다. 나는 뿔이난 아이처럼 생각나는 데로 아내에게 이름들을 던졌다. 아내는 찡그린 표정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그러던 중 “노마만리”라는 단어에 반응이 왔다. 걔 중에선 그나마 그것이 가장 낫다며 오케이 신호를 보냈다.
그러고 보니 김사량의 항전 기행문 “노마만리”(駑馬萬里)를 처음 접했을 때 나도 그 제목이 꽤나 멋지다고 생각했다. 북경반점의 복마전을 뚫고 광활한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태항산 해방구로 향하는 김사량의 여정에 어울리는 비장 하면서도 낭만적인 이름이었다. 정확한 뜻을 찾아보니, “둔한 말로 만리를 간다.”는 뜻이었다. “우공이산”이나 “우보천리”와 같은 고사와 일맥상통했다. 책방의 이름이 소설가 김사량의 비장한 연안행을 연상시킬뿐더러 엉덩이 무거운 연구자들이 둔한 몸으로 우직하게 한발 한발 앞으로 향해 가는 모습 또한 상징하는 것 같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책방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래, 바로 이 이름이야!”
“책방 노마만리”라는 이름은 그렇게 탄생하였다. 공교롭게도 나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평양 양서각에서 발행한 김사량의 “노마만리” 초판을 소장하고 있었다. 책방 한편에 “노마만리” 초판을 전시한다면 그 얼마나 뿌듯할지 생각만 해도 입 꼬리가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