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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언 Apr 06. 2022

천안에 자리를 잡다

책방 노마만리 이야기 2.

천안에 책방을 낸다고 하니 다들 깜짝 놀라 하며 어떻게 해서 천안까지 가게 됐는지 궁금해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딱히 적당한 이유를 대지 못하고 얼버무린다. 전혀 연고도 없는 그곳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우연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고 보면 사람도 집도 다 인연이 있나 보다.


작년에 부모님께서 꽤 많은 돈을 증여해주셨다. 자식이 월세를 받는 안정적인 삶을 살길 원하신 터라 부모님의 바람에 따라 한동안 인터넷을 통해 적당한 부동산이 있는지 뒤지고 다녔다. 그러던 중 한 유튜브 부동산 채널에 올라온 전주의 한옥이 눈에 들어왔다. 


2021년 12월 3일 아내와 함께 한옥스테이로 운영되고 있는 그 건물을 보러 전주에 갔다. 그곳은 전주 한옥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남문시장 북쪽 편이었다. 부동산 중개업자가 알려준 주소에 도착하니 번듯한 한옥이 눈앞에 나타났다. 실제 건물은 생김새도 일반적인 민가 같지 않았고 규모도 더 컸다. 아무래도 전주관아가 헐리면서 민간에 불하된 건물 중에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부부는 잘생긴 그곳 한옥이 마음에 들었다. 


이 건물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130년 전인 1894년, 갑오농민전쟁과 중일전쟁이 발발한 해에 지어진 전주 시내에서 가장 오래된 가옥이었다. 동학농민군이 1894년 4월 전주성에 입성했으니 어쩌면 그 광경을 목격했을 수도 있는, 우리 굴곡의 근현대를 묵묵히 지켜본 대견한 건물이었다. 현재 이 건물은 한옥스테이를 위해 대대적인 수리를 마쳐서인지 130년 전 건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상태가 양호했다. 그 바로 옆에는 현대식으로 지어진 관리동이 따로 있다는 점도 장점이었다.


전주 한옥의 매력에 빠진 채 우리는 부동산 사장님에게 좀 더 생각해 보고 연락을 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주를 떠나 집으로 향했다. 나의 머릿속은 이미 그 한옥을 어떻게 활용할 건가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아니면 어디선가 사고가 났는지 그날 고속도로는 정체가 심했다. 운전석 옆자리에 앉았던 아내는 피곤한지 잠깐 눈을 붙였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잠에서 깬 아내는 진지한 말투로 툭 말을 던졌다. 


“아직 절반도 안 왔네. 너무 멀다. 전주는 안 되겠다.” 


고속도로 정체로 집에 돌아가는 시간이 유독 길게 느껴져서인지 말은 안 했지만 나도 반쯤은 수긍한 상태였다. 연고가 있으면 모를까 집과 전주를 오가는 게 보통일이 아니라는 아내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그 건물에 홀렸는지 아내의 말에 선선이 동의하기가 싫었다. 


책방 노마만리 주차장에서 바라본 마정저수지


나는 아내에게 유튜브에서 본 천안의 마정저수지 인근 건물을 보고 올라가자고 했다. 그쪽 부동산 중개업소에 전화를 걸어 급하게 약속을 잡았다. 우리는 막 해가 떨어질 것 같은 시간에 그곳에 도착했다. 부동산 사무실에서 나온 분이 건물주와 함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작은 중정이 나왔고 잘생긴 소나무가 조명을 받아 더욱 멋있었다. 우리는 빠르게 1층서부터 3층까지를 둘러보았다. 옥상에서 본 해질 무렵의 저수지 풍경은 운치가 있었다. 거기에 전주를 다녀오다 보니 한 시간 반 거리의 천안은 서울에서 지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이 마음에 들었지만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가격 보다 비싸게 나온 매물인지라 속으로 감탄만 하고 말았다. 


며칠 후 천안의 부동산 사무실에서 연락이 왔다. 최대한 가격 흥정을 해보겠다면서 얼마를 원하는지 물었다. 그때 나는 식중독에 걸려 열이 40도에 육박한 상태라 정신이 혼미했음에도 부동산 중개업소 사장의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이 복잡하게 굴러갔다.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최선의 금액을 불렀다. 부동산 중개업소의 사장은 똑부러진데가 있었다. 그 가격으로는 거래가 성사되기 불가능하다며 자신이 생각하는 금액을 이야기했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거래가 성사 안 돼도 괜찮으니 내가 말했던 가격과 부동산 중개업소 사장이 말한 가격 그 중간으로 맞춰달라고 못을 박듯 말했다. 사장은 최대한 노력해보겠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12월 8일, 부동산 중개업소에서 거래가 성사됐다며 전화가 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겁이 났다. 이렇게 급하게 결정해도 되는지 걱정이 시작되었다. 내 마음도 모르는지 부동산 중개업소 사장은 빨리 계약금을 입금하라고 재촉했다. 나는 뭔가 홀린 듯 알겠다고 이야기하고 돈을 보냈다. 그렇게 얼떨떨한 상황에서 천안과 인연을 맺게 됐다. 


나는 지금도 전주로 가는 길에 그곳을 들렸다면 천안의 책방 노마만리는 시작조차 없었을 거란 생각을 갖고 있다. 전주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곳을 들렀기에 전주보다 가까운 그곳 천안이 보다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것 같다. 또한 신중하게 고민한다고 자주 그곳에 들러 이것저것 하나하나 뜯어보기 시작했다면 번민은 보다 커졌을 것이며 계속된 회의로 그곳의 안 좋은 면만 강조하듯 떠올라 결국 다른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책방 노마만리가 천안에 자리 잡게 된 것은 결국 우연이지만 우연이란 대단한 인연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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