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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언 Feb 26. 2021

4.19와 임화수

한국영화 이야기 3.



1960년 3월 15일에 정부통령 선거가 있었다. 이 선거에서 이승만 정권은 큰 부정을 저질렀다. 이에 분노한 시민, 학생들에 의해 일어난 것이 4.19 혁명이다.


당시 영화계를 주름잡고 있었던 한국연예주식회사의 임화수는 자유당 정권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었다. 4.19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4월 18일 고대생 시위에서 시위대가 해산하는 과정에 깡패들이 학생 시위대를 습격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를 주도했던 소위 동대문사단의 2인자가 임화수였다. 그러다 보니 4.19 직후에 이들 정치깡패들을 소탕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었고 임화수도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동아일보 1961.8.25.


임화수의 본명은 권중각으로 고향은 경기도 여주이다. 고아로 자랐다고 알려져 있으며 어려서부터 종로 5가 제일극장 매점에서 일을 했다. 어린애가 목판을 메고 극장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물건 파는 게 귀여웠는지 제일극장에서 공연을 펼치던 악극단 극작가 임서방이 양자로 삼고 임화수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때부터 임화수라는 이름으로 살기 시작했다.


해방이 되고 악극단 배우가 되고 싶었던 임화수는 가수가 되기 위해 콩쿠르에도 나갔지만 배우가 아닌 무궁화악극단의 실무를 맡게 된다. 그리고 함께 어울리던 건달들과 함께 이승만이 이끌던 우익단체 독청(독립촉성국민회)에 가입해 동대문 지역 감찰부장으로 활동했다. 이승만 정권이 들어설 무렵 악극단의 운영자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전쟁이 터졌다. 운이 좋게도 대구에서 공연하던 중에 전쟁을 맞았다. 후방 지역에 있던 그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육군 특무부대 문관으로 임명된 후 자기가 데리고 있던 극단과 피난 온 연예인들을 중심으로 전선 위문단을 조직해 위문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 서울로 올라 온 후 목판을 메고 물건을 팔았던 제일극장을 인수하여 평화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하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 극장주가 된 것이다.


원래 제일극장을 인수받은 사람은 동대문사단의 두목이던 이정재였다. 경찰 출신으로 전쟁으로 파괴된 광장시장의 복구에 관여하면서 큰 이권을 얻게 된 그는 광장 시장 맞은편에 있던 제일극장도 인수하게 된다. 제일극장은 극장주인 이창용이 탈세혐의로 조사를 받던 중 일본으로 밀항해 도망간 상황에서 전쟁이 터지면서 주인 없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극장을 인수한 이정재는 극장 운영이 익숙지 않다 보니 극장 운영을 잘할 것 같은 임화수에게 극장을 맡아 운영하라고 넘겼다.


임화수가 영향력을 확장해 나가는 방식이 독특했다. 이승만의 비서 출신으로 정치자금 조달을 담당하며 큰 권력을 쥐었던 강일매라는 인물과 함께 한국연예주식회사를 세웠다. 한국연예주식회사는 당시 최대의 악극단 3개를 통합한 거대 연예회사로 일 년에 수십 편의 영화를 만들어 내면서 1950년대 가장 큰 영화회사가 된다. 이 회사에서 강일매는 회장이었고 임화수는 사장이었다.  그리고 시공관장이던 백순성을 앞세워 전국극장협회를 세우고 본인은 부회장이 되었다. 서울시극장협회를 중심으로 영화계 권력자로 군림하던 홍찬과 대립각을 세우기 위한 조치였다. 여기에 유치진을 앞세워 <예술시보>라는 연극, 영화 전문신문을 발간한다.


그러니까 임화수는 강일매, 백순성, 유치진 등 사계의 실력자들을 앞세우고 자신은 뒤에 서서 이들을 조종하면서 권력을 획득해 나가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그 이유는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자기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열등감 때문에 학력이 높은 사람들을 앞세우가 자신은 2인자에 만족하면서 입지를 다지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다.  


2인자의 위치에 있던 임화수가 1인자로 등극하기 시작한다. 이승만의 양아들을 자처하던 수도영화사의 홍찬이 파산하고, 강일매가 사망하자 임화수는 한국연예주식회사를 손아귀에 쥔 상태로 연극, 영화인들을 총동원하여 반공예술인단을 만들고 이승만을 명예총재로 추대한다. 반공예술인단의 명예총재가 된 이승만은 임화수를 기특해했는데, 이승만의 총애가 어느 정도였냐 하면 그를 문교부장관 후보로까지 생각할 정도였다.


임화수는 배움이 없었기에 장관은 될 수 없었지만 자유당 정권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60년 선거를 앞두고 임화수는 연극, 영화인들을 자유당의 선거운동에 총동원시킨다. 국민들에게 큰 사랑을 받던 김승호 같은 배우들은 이승만과 이기붕의 선거운동에 가장 앞자리에 있었다. 그러다 보니 4.19가 터지자 화난 군중들이 청진동에 있던 김승호의 집으로 쳐들어가기도 했다. 김승호는 군중들을 피해서 당시 동아일보 영화기자였던 호현찬의 집에 숨어 지냈어야 했다.


이렇듯 권력과 밀접하게 있으면서 권력을 휘둘렀던 임화수는 4.19 이후 부정선거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한해 뒤에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일종의 본보기로 사형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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