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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언 Mar 01. 2021

영화 <독립협회와 청년 리승만>

한국영화 이야기 4.

임화수의 한국연예주식회사에서 1960년 선거를 앞두고 만든 <독립협회와 청년 리승만>은 이승만 대통령의 젊은 시절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갑신정변으로 시작하여 독립협회 활동, 투옥, 미국 망명까지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신상옥 연출,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1960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나이는 85세였다. 임화수는 늙은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 이승만의 청년시절을 영화로 담기로 한다. 이 영화에는 반공예술인단에 소속된 당대 최고 영화인들이 총출연하였는데 이승만 역에는 김진규, 고종황제 역에는 김승호, 그리고 최은희, 도금봉, 김지미, 엄앵란 등 인기 있던 여배우들이  출연할 정도로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했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조선 후기에서 일제 강점 초기까지이다보니 그 당시를 재현하기 위해 대규모의 오픈 세트와 실내 세트가 지어졌다. 예컨대 조선시대 종로를 재현해 세트로 만들었고 독립문도 만들었다. 뿐만아니라 청일전쟁 장면을 재현했으며 종로에 가득한 군중을 촬영하기 위해 엄청난 수의 엑스트라 동원다. 한눈에 봐도 돈이 엄청나게 들었을 것 같은 느낌의 영화였다.


제작자인 임화수는 이렇게 큰 규모의 영화를 연출하는 데 있어서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코미디나 멜로에 능한 감독들이 아닌 스케일이 큰 영화를 진중하고 뛰어난 감각으로 만들어 낼 것 같은 젊은 감독을 투입시켰다. 그 사람이 바로 신상옥이다.


이 영화를 연출한 신상옥의 회고를 보면, 이승만이 미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서울을 떠나는 장면을 한강변에서 촬영하는데 멀리 증기선이 지나가면 좋을 것 같다고 말하니까 정부에서 실제 구한말에 사용되던 증기선을 구해 한강에 띄워줬다고 이야기했을 정도로 정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던 영화였다.


1959년 영화가 완성되자 이 영화는 선거용으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상영되었다. 4.19 혁명이 발발하기 직전 신상옥 감독과 부인 최은희 여사는 도쿄에서 개최되던 아시아태평양영화제에 <로맨쓰 빠빠>를 가지고 참가했다. 이때 젊고 야심만만한 이들 부부는 다음 작품으로 <춘향전>을 칼라 시네마스코프 영화로 제작할 계획을 세우고 일본에 간 김에 칼라 시네마스코프로 촬영할 수 있는 기자재를 구입해서 돌아왔다.


1960년 아시아태평양영화제에 참석 후 경무대로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귀국보고를 하고 난 며칠 후 4.19 혁명이 터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했고 자유당 정권은 몰락했다. 영화계에서는 이승만 정권에 부역했던 영화인들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임화수의 재판정에는 이들 영화인들이 참고인으로 불려 갔다.


임화수가 제작한 <독립협회와 청년 리승만>을 연출했던 신상옥 감독 역시 법정에 불려 가서 증언대에 서야 했다. 그러다 보니 차기작인 <춘향전>의 제작은 늦어졌다. 이 와중에 홍성기 감독도 <춘향전>을 칼라 시네마스코프 영화로 만들겠다고 나서면서 4.19 이후 두 편의 <춘향전>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 두 편의 <춘향전>은 공교롭게도 일주일 차이를 두고 개봉이 이루어졌다. 결과는 홍성기 감독이 만든 <춘향전>보다 늦게 개봉한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이 당시 최고의 흥행 기록을 갈아치우게 된다. 소위 신필름의 신화가 시작된 것이다.


복녀 역의 엄앵란과 리승만 역의 김진규


<독립협회와 청년 리승만>은 신상옥에게 부패한 정권의 홍보영화를 찍었다고 하는 불명예와 정권이 총동원되어 제작되는 엄청난 스케일의 영화를 연출하는 남다른 경험을 갖게 해 준 영화였다.


신상옥 감독은 북한의 교화소에 있으면서 자신이 지금껏 만들었던 영화들에 대해 하나씩 하나씩 머릿속으로 복기했다. 이 영화는 이 부분이 잘못되었던 것 같다. 혹은 이 부분은 편집을 다시 했으면 좋겠다 등등. <독립협회와 청년 리승만>의 경우는 속편을 찍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이승만 역을 맡은 김진규도 1980년 무렵이면 나이를 먹었을 테니 김진규가 노인이 된 이승만 역을 다시 맡아 하와이로 망명한 이승만이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영화를 만들어서 권력의 무상함을 표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여러 가지 여건상 실현될 수 없었다. 신상옥 감독 스스로는 이 영화가 작은 영화사를 운영하고 있던 젊은 감독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이 큰 스케일의 기획이었고 이 기획을 통해 개인적으로는 연출 능력을 인정받고 어디서든 큰 스케일의 영화를 능숙하게 만들어낼 수 있는 자산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정치적인 문제는 차치하고 말이다.


이승만 대통령도 이 영화를 봤다. 사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이 경험하고 기억하고 있던 과거와 영화로 재현된 과거는 달랐을 테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화수를 비롯해 영화인들이 총동원되어 이승만 우상화 영화를 만든 데는 선거 이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이 무렵 북한에서 김일성의 항일 유격투쟁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남한의 영화인들은 북한영화에 뒤지지 않는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김일성보다 뛰어난 항일 영웅 이승만 대통령을 주인공으로 하여 스펙터클 한 영화의 제작을 기획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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