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이야기 5.
한국영화 100년의 역사에서 가장 기억할만한 장소를 꼽는다면 어디를 꼽을 수 있을까? 아마도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인 연쇄극 <의리적 구토>(1919)가 상영된 종로 3가의 단성사를 첫 손에 꼽힐 것 같다.
단성사는 1907년에 설립되어 2012년까지 영화관으로 있었다. 최초의 한국영화라고 하는 연쇄극 <의리적 구토>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영화 <아리랑>(1926)과 우리나라 최초의 토키 영화인 <춘향전>(1935) 등 한국영화 역사의 굵직굵직한 영화들이 상영된 역사적으로 의의가 큰 극장이다.
한국 최초의 영화를 연쇄극 <의리적 구토>라고 한다. 연쇄라는 말은 쇠사슬이 연결된 모양을 뜻하는 단어이다. 그 당시 두 종류의 성격이 다른 흥행물이 결합한 것을 연쇄물이라고 불렀다. 연극에 영화를 결합한 것을 연쇄극, 반대로 영화의 일부분을 연극으로 공연하는 것을 연쇄활동사진이라고 구분해 불렀다. <의리적 구토>는 연쇄극, 다시 말해 연극을 공연하던 중에 무대에서 보여주기 힘든 장면을 영화로 찍어서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연쇄물이 유행하게 된 이유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에서 수입되던 필름의 양이 줄어든 것이 원인이었다. 영화관에서는 프로그램 전체를 가격이 폭등한 영화로 채울 수 없었다. 그래서 극장에 소속된 변사나 연극을 공연하는 극단을 이용하여 연쇄극이나 연쇄활동사진을 만들어 공연했다.
서울에 있었던 일본인 영화관에서 일찍부터 이런 흥행물이 유행했다.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 단성사에서 우리도 연쇄극을 만들어보자고 하여 제작이 추진되었다. 이때 상연된 <의리적 구토>는 신극좌가 공연할 연극 작품이었는데 이 작품에 장충단공원이나 서울역, 한강철교와 같은 서울 시내의 랜드마크와 같은 장소를 배경으로 자동차 추격신을 촬영해 삽입했다.
최초의 영화가 단성사에서 상영된 이유가 있었다. 사실 최초의 영화인 <의리적 구토>는 단성사의 돈으로 제작된 연쇄극이었다. 당시 서울에는 우리나라 사람이 소유한 영화관이 한 곳도 없었다. 단성사도 운영만 박승필이라는 조선인이 했지, 소유권자는 일본인 다무라 기지로이었다. 1918년 활동사진관인 단성사를 운영하게 된 박승필은 우리 손으로 영화를 만들어 보고자 했다. 그래서 영화의 인기로 공연할 곳을 찾지 못해 활동을 접은 신파극단 두 곳을 단성사 휘하에 두고 연쇄극 제작을 배우도록 한다. 그때 처음으로 제작된 연쇄극이 <의리적 구토>였고, 이 연쇄극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1921년 무렵까지는 연쇄극의 시대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작품이 제작되었다.
이 당시 제작된 연쇄극의 많은 수는 단성사에서 자금을 대서 만든 것이었다. 서울에 우미관과 같은 조선인 극장이 있었으나 연쇄극이 단성사의 자금으로 만들어지다 보니 대부분의 연쇄극은 단성사에서 개봉하였다. 한국영화의 탄생에 있어 단성사의 역할이 지대했다.
단성사에서는 연쇄극 말고 영화도 제작했다. 연쇄극의 시대가 저물 무렵 조선에서 활동하던 일본인들이 영화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생겨난다. 이중에 하야가와 고슈라는 일본인이 조선인이 가장 좋아하는 고소설 <춘향전>을 영화로 만들어 단성사에서 상영한다. 이에 단성사 운영자인 박승필이 충격을 받게 된다. 원래 박승필은 광무대라고 하는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과 같은 판소리를 비롯해 우리 전통의 노래와 춤을 공연하던 광무대를 운영하고 있었다. 자칭, 타칭 <춘향전>에 대해서는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고 있던 그가 일본인이 만든 <춘향전>을 보고 선수를 놓쳤다고 탄식하게 됐던 것이다. 그래서 단성사에서는 1924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영화를 만들어 보고자 단성사 안에 활동사진반을 조직한다. 그리고 우리의 고소설을 영화화하기로 하는데 이때 만들어진 영화가 <장화홍련전>이었다. 이 영화는 스태프와 배우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순수 조선인의 손으로 만든 영화라는데 의의가 있다.
장화홍련전 이후 단성사에서는 직접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사람이나 단체에 재정적 후원을 하고 영화가 완성되면 단성사에서 상영하여 투자금을 회수하는 전략을 취하게 된다. 이때 단성사의 박승필이 눈여겨본 인물 중에 <아리랑>을 만든 나운규도 있었다. 나운규는 일본인이 세운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이라는 곳에서 <아리랑>과 <풍운아>라는 영화를 만들어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때 단성사의 박승필이 나운규에게 일본인 밑에서 고용살이를 하지 말고 자신이 자금을 댈 테니 독립을 하라고 권하게 된다. 그래서 나운규는 일본인 회사에서 나와 자신의 이름을 딴 나운규프로덕션을 조직하고 단성사의 돈으로 영화를 만들게 된다.
나운규프로덕션 외에도 단성사에서는 금강키네마나 원방각사와 같은 영화회사를 직간접적으로 후원하게 된다. 무성영화 시대 만들어진 영화의 절반 정도가 단성사의 자금으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단성사는 무성영화 시대 한국영화 제작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영화관이다.
1930년대 초반 단성사를 이끌던 박승필이 사망하고 박정현이 새로운 운영자가 된다. 이즈음 토키 영화가 수입되어 상영되기 시작하는데 단성사는 서울의 어느 극장보다 먼저 거액을 들여 토키 영화 전용 영화관으로 재건축을 하게 된다. 이때 1,000명을 넘게 수용하던 영화관이 680석으로 줄어든다. 건축허가가 엄격하게 바뀌면서 관객을 절반밖에 수용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토키 영화는 필름 가격이 월등이 비쌌기 때문에 적자가 누적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경영이 어려운 틈을 타서 일본인 흥행사들은 단성사의 운영권을 뺏어가게 된다. 박정현에 이어 단성사를 운영하게 된 명치좌 주인 이시바시 료스케는 이름도 대륙극장으로 바꾸게 된다. 일본의 대륙 침략 야욕을 드러낸 대륙극장이라는 이름은 해방이 되어서야 다시 단성사로 바뀌게 된다.
사실 토키 영화가 상영되는 1930년대 이후 영화관의 중심은 단성사가 있는 종로가 아니라 남촌이라고 불리는 을지로나 명동과 같은 지역이었다. 1930년대 이후 서울의 가장 큰 영화관은 명동의 명치좌, 을지로 4가의 황금좌(국도극장), 충무로 쪽의 약초극장(스카라극장)이었다. 이들 영화관은 1,000석이 넘는 좌석수를 가지고 있었으며 관람환경도 쾌적했다. 반대로 종로 지역은 낙후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해방이 되어도 상황이 좋아지기는커녕 더욱 나빠지게 된다. 특히 해방 직후 일제강점기 가장 큰 유곽인 신정유곽이 철거되자 단성사가 위치한 종로 3가 일대에 종삼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사창가가 형성되어 이 지역이 불건전한 우범지역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다 보니 한국영화의 전성기라고 하는 1960-70년대 영화의 거리는 불건전한 종로 3가가 아닌 국제극장과 아카데미극장 등이 모여 있었던 태평로와 무교동 일대로 바뀌게 된다. 이곳에는 영화를 보며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이들이 드나드는 세시봉과 같은 세련된 음악다방들을 비롯해 청춘남녀들이 즐길 수 있는 데이트 장소였다.
이러던 상황에서 김현옥 서울시장의 소위 나비 작전이라고 하는 종로 3가 일대의 사창가를 없애는 군사작전과 같은 도심지 정비사업으로 종로 3가 일대가 쾌적한 공간으로 바뀌게 된다. 여기에 태평로의 도로 확장과 아카데미극장, 국제극장들이 문을 닫으면서 서울의 대표적인 극장가는 다시 종로 3가로 바뀌게 된다. 종로 3가에는 단성사 말고도 피카디리, 서울극장이 자리하고 있어서 다들 이곳에서 한두 번씩은 영화를 본 기억이 있는 영화 관람의 대표적 장소가 된다.
<장군의 아들>이나 <서편제>와 같은 중요한 한국영화가 단성사에서 상영되었지만 사실 단성사는 한국영화보다는 할리우드 영화를 더 많이 상영하던 영화관이었다. 1950년대 입장세 면세조치 등으로 한국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과 외국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당시 단성사는 주로 외화관으로 활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의 흥행작들이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예를 들어 장미희가 주연한 <겨울여자>가 여기서 상영되어 관객 58만 명을 동원해 한국영화 최고 관객 동원을 했고, 1990년에는 <장군의 아들>이 67만 9천 명의 관객을 동원하여 <겨울여자>가 가지고 있던 한국영화 최고 관객수를 갱신했다. 이 기록도 1993년 <서편제>가 6개월 동안 상영되면서 85만 명을 동원하며 갱신하게 된다. 이 영화들 모두 단성사에서 개봉한 영화였다. 단성사는 해방 후 한국영화 흥행작들을 상영하면서 한국영화와의 끈끈한 관계를 이어가게 된다.
1990년대 후반 강변 cgv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인 멀티플렉스 시대가 열리게 된다. 도심의 교통이 편리한 지역에 쾌적한 모습의 영화관은 우리의 관람문화를 빠르게 변화시켰다. 멀티플렉스의 등장으로 서울 중심가에 있는 단관극장들도 변화를 꾀하게 된다. 국도극장과 스카라극장과 같은 역사가 오랜 극장들이 문을 닫았고, 대한극장이나 피카디리, 단성사는 멀티플렉스로 전환을 꾀하게 된다.
도시 중심지에 위치하여 개봉관이라는 프리미엄이 존재하던 시기에 잘 나가던 이런 영화관들은 영화 관람과 쇼핑, 외식이 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쇼핑센터 안에 위치한 멀티플렉스를 당해내지 못한다. 이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단성사는 멀티플렉스로 전환 직후 경영난으로 부도가 난다. 이후 여러 번 주인이 바뀐 후 2012년 영화관으로써의 역할을 마감했고 현재는 단성사 건물의 일부를 역사관으로 만들어 한국영화 100년의 중심지였던 단성사를 추억하는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그럼 왜 종로 3가에 영화관이 들어섰을까? 서울에 들어선 극장들은 교통과 관련이 있었다.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연결되는 전차가 1899년 놓이게 되는데, 종로 3가에 전차 정류장이 들어섰습니다. 자연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였고 정류장 근처 공터에 극장을 설립했다. 단성사가 서 있는 곳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거처하는 창덕궁으로 향하는 길 초입에 해당한다.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던 탑골공원 근처이기도 했다. 그래서 3.1 운동 당시에는 학생들이 극장 안에서 전단을 뿌리기도 했고, 6.10 만세운동 당시에는 순종의 상여가 그 앞을 지나갔는데 학생들이 그곳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렇듯 단성사는 서울의 중심지인 종로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역사적 사건의 배경이 되었다. 영화 <밀정>의 첫 장면이 의열단원인 김상옥 열사가 일경에게 추격당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 김상옥 열사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 단성사에서는 일본인들이 만든 <국경>이라는 제목의 조선인 독립군들을 마적으로 묘사한 영화가 상영되어 조선인 관객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든다. 결국 학생들의 격렬한 항의로 영화 상영은 중단되었다.
극장이라는 공간이 민족적 감정을 응축시켜 폭발시키는 힘이 있었기에 극장 안에는 관객들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 경찰이 항상 지키고 앉아 있었다. 김상옥 사건이 마무리된 후 종로경찰서장은 극장주들을 모아놓고 영화관에서 허무맹랑한 영화들을 상영해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백주대낮에 총격전을 벌이는 사건이 일어났다며 질타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