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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언 Mar 10. 2021

한국영화와 충무로

한국영화 이야기 6.

한국영화사에서 “1950년대”는 어떠한 시대였나?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온 사람들, 이중 문화예술인들은 명동에 모였다. 영화인들 중 일부는 명동을 떠나 충무로 3가 부근으로 옮겨갔다. 전쟁으로 인해 영화 제작시설이 열악한 가운데 필동에 있는 군 촬영소를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필동의 군 촬영소에서 영화가 제작되면서 영화 제작회사들은 충무로 3가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1954년 국산영화 면세조치가 시행되면서 영화 제작 편수가 급증하게 된다. 충무로 3가 5 거리에는 영화회사들과 영화 관련 회사들이 빼곡하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 무렵 한국영화를 지칭하는 용어로 충무로라는 단어가 만들어져 사용된다. 충무로는 1950년대 이후 한국영화를 상징하는 곳이 되었다.


사실 충무로는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영화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장소였다. 일제강점기 이곳은 본정, 다시 말해 혼마치라고 불렸던 곳이다. 서울에 살고 있는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가장 먼저 자리 잡은 중심지가 바로 이 길이었다.


충무로 3가 5거리


충무로는 명동 중앙우체국 옆 골목에서 시작하여 퇴계로 5가 충무초등학교까지 이어진 길을 말한다. 남대문에서 한국은행 방향으로 오다 보면 명동 방향에 일직선으로 보이는 좁은 골목이다.


충무로는 을지로나 퇴계로처럼 대로가 아니다. 충무로를 걸어보면 그 이름에 비해 무척 좁다고 느껴질 것이다. 약 150년 전에 만들어진 길이라 마차 두 대가 지나가면 되는 지금 입장에선 좁은 길이다.


충무로는 꽤 길고 넓다. 이중 한국영화와 관련된 곳은 충무로 3가이다. 이곳은 명동역과 충무로역 중간쯤에 위치한 곳으로 남산 1호 터널로 이어지는 삼일대로의 우측 지역이다.


갑신정변 이후 체결된 한성조약으로 일본은 남산에 영사관을 지었다. 남산 밑으로 일본인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그곳이 지금의 충무로 3가이다. 일본인들은 그곳에 학교도 짓고, 극장도 짓고 상점도 열고 그랬다. 일본인들이 만든 최초의 극장이 그곳에 있었다.


일본인이 지은 최초의 극장 자리에 1920년대 초반 무렵에 경성 극장이 새롭게 만들어진다. 이 극장은 1929년 화재를 당하게 되는데 이후 이 극장을 재건하여 운영한 사람이 와케지마 슈지로라는 일본인이다. 이 사람이 경성 극장을 운영하면서 영화제작소인 경성 촬영소를 그 인근에 만들어 여러 편의 영화를 만들어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 1935년에 만들어진 최초의 토오키 영화인 <춘향전>이다. 현재 남아 있는 영화로는 1936년 작 <미몽>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토키 영화이다.


경성 극장과 경성 촬영소를 운영하던 와케지마 슈지로는 한마디로 말해 서울의 야쿠자 두목이다. 일본 우익들과 관련되어 있던 인물로 대일본국수회 경성지부장이기도 했다. 이 사람이 1920년대 후반 영화관인 중앙관을 운영하였는데 1929년 경성 극장이 화재가 나자 경성 극장의 주식을 가지고 있던 그가 주주총회를 소집하고 주주들을 협박하여 경성 극장 재건을 추진하고 자신이 재건된 경성 극장을 운영다. 더불어 조선영화사라는 영화회사를 세우고 영화 제작에도 나다. 이때 와케지마가 손잡은 인물이 우리가 잘 아는 나운규와 일본인 검극 배우  도야마 미츠루였다. 도야마 역시 일본 극우 인사였다.


1920년대 경성극장


와케지마와 손잡은 나운규는 조선영화인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되어 손을 떼게 된다. 도야마 역시 몇 편의 영화를 만들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이후 와케지마가 손잡은 인물이 이필우와 이명우 형제였다. 이들은 <홍길동전>, <대도전>, <아리랑고개>, <장화홍련전> 등을 제작했다. 조선영화사 경성촬영소는 1930년대 중반 대표적인 영화 제작회사로 군림했다. 하지만 토키 시대가 시작되면서 과다한 제작비가 투입되어야 하는 상황이 되자 영화 제작 분야는 영화회사 고려영화협회에 매각한다. 경성 극장 역시 일본의 영화회사에 매각한 후 와케지마는 철원으로 가서 극장 운영에 힘쓴다.


해방 이후 충무로가 한국영화의 전면에 등장한 건 전쟁 이후부터이다. 충무로의 성쇠는 한국영화의 발전 과정과 비슷하다. 1950년대는 충무로 형성기였으며 1960년대는 전성기, 1970년대는 쇠락기, 1980년대 이후는 해체기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한국영화의 전성기라는 1960년대 충무로에는 영화인들이 모이는 다방이 있었다. 영화를 만드는데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사람이었다. 사람이 모이는 장소가 다방이었다. 당시 충무로에는 스타다방, 청맥 다방, 태극 다방 등이 유명했다. 집집마다 전화를 가질 수 있던 시기가 아니었기에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다방을 통해서였다. 배우들이 모이는 다방이, 스태프들이 모이는 다방이 따로 있었다. 충무로 3가 오거리에 있었던 스타다방은 스타를 꿈꾸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보조출연자가 필요하면 이곳에서 그날그날 사람을 채용했다. 이렇게 사람들이 다 모이면 버스를 타고 촬영소나 로케이션 장소로 출발한다. 영화 관련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충무로로 나와야 했다. 밤새워 일해야 하는 사람들은 충무로 일대의 여관을 빌려서 생활했다.


이 당시 영화 제작 방식을 충무로 시스템이라고 부른다. 일종의 한국영화가 만들어지는 독특한 방식을 일컫는 용어이다. 영화라는 게 원체 리스크가 큰 사업이다 보니 10편을 만들면 8편은 망하는 게 통상적이다. 그래서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대신 많은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시스템이 고안되어 정착된다. 다시 말해 서울의 영화제작사에서 제작비 전체를 투자하는 것이 아닌 제작비의 일부만을 투자하고 나머지는 지방의 흥행업자들을 투자자로 끌어들이는 방식을 채용한 것이다. 대신 영화가 완성되면 서울의 흥행권은 영화제작자가 갖고 각 지방의 흥행권을 지방의 흥행업자가 나눠 갖는다. 당시 각 도별로 흥행 권역이 나눠져 있었다. 예컨대 투자자로 참여한 부산지역의 흥행업자는 부산과 경남지방의 독점적 흥행권을 보장받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해서 제작자는 리스크를 줄이고 지방 흥행업자들은 확실한 프로그램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주식투자와 비슷하게 분산 투자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사라지기 전 스카라극장


1970년대 한국영화는 쇠퇴한다. 영화산업이 쇠퇴하는 주된 이유는 모든 나라가 비슷했다. 바로 텔레비전의 보급이었다. 1970년대 들어 우리나라에도 본격적으로 텔레비전 보급이 시작된다. 이와 반대로 1970년을 정점으로 영화산업은 쇠퇴한다. 10년 만에 영화 관객수는 반토막으로 줄어들었다. 1980년대 들어 외국영화 수입자율화와 UIP직배가 시작되자 영화업자들은 영화 제작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충무로의 영화회사들은 하나씩 하나씩 문을 닫기 시작했다.


1950년대부터 활동하던 영화인들도 이 무렵 은퇴한다. 새로운 젊은 제작자들은 낡은 충무로를 기피했다. 종로나 강남에 사무실을 냈다. 예전처럼 충무로에 옹기종기 모여 있을 필요 없었다. 충무로는 1990년대 들면 사실상 영화와 관련 없는 장소가 된다. 과거의 추억이 서린 장소로 남게 된 것이다.

 

충무로라는 이름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관련 있다. 충무로 3가 5 거리에서 옛날 스카라 극장 방향으로 가다 보면 명보 4거리가 나온다. 바로 명보아트홀이 자리한 곳이다. 그곳이 이순신 장군의 생가가 있던 자리이다. 이순신 장군과 관련이 있는 장소이기 때문에 그곳을 충무로라 붙인 것도 있다. 하지만 충무로와 이순신 장군 생가 터는 좀 떨어져 있다.


 해방되고 일본식 지명을 우리식으로 바꾸었다. 특히 일본인들이 주로 살던 일본인 중심가는 일본의 영향력을 지우기 위해 우리나라를 침략한 적을 물리친 위대한 장군들이나 위인들의 이름을 붙였다. 예를 들어 본정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기운을 이용하기 위해 충무로라 지었고, 황금정은 을지문덕 장군의 이름을 따서 을지로가 되었고, 일본왕의 연호인 소화를 써서 만든 소화통은 퇴계 이황 선생의 이름을 따서 퇴계로가 되었다. 조선총독의 성을 따서 이름 붙인 장곡천정은 작은 사람이라는 뜻의 소공로로 바뀌기도 했다. 본정은 서울에 살던 일본인들의 심장과 같은 곳이라서 충무로라 지었다. 일본을 제대로 이기기 위해서는 이순신 장군의 힘을 빌리고자 했던 의지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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