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이야기 7.
경성고등연예관은 지금의 을지로 2가에 있었던 영화관으로 최초의 활동사진관이라 광고되던 곳이다.
이 영화관은 1910년 2월에 개관했다. 원래는 1909년 10월에 개관할 예정이었다. 당시 일진회 기관지인 국민신보에 경성고등연예관이 개관한다는 내용의 광고가 실렸다. 그런데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일어나면서 조선 내 일본인들은 이토를 추모하기 위해 가무를 삼가는 등 추모 분위기를 이어갔다. 그런 이유로 영화관 개관은 다음 해로 연기되었다.
이토는 영화가 지닌 선전 능력을 아주 잘 알고 있던 인물이었다. 러일전쟁 이후 일제가 우리나라를 보호국으로 만들자 전국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났다. 이토는 일본의 보호 아래 평온한 한국의 모습을 선전하기 위해 일본의 영화회사인 요코다 상회에 의뢰하여 영화를 만들게 시킨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통감부 원유회>, <한국 풍속>, <한국일주>와 같은 영화였다. 이중에 <한국일주>는 이토가 순종황제를 모시고 지방을 순찰하는 모습을 담은 영화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영화를 선전에 활용하던 이토는 암살당하던 모습까지 촬영되어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일본 내에서는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상영되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암살하면서 개관이 미뤄졌던 경성고등연예관은 가네하라 긴죠라는 이름의 고무 농사를 짓기 위해 태국에 거주하던 일본인이 설립했다. 그에게 필름을 공급해 주던 인물은 와타나베라는 일본인이었다. 이 사람이 태국에 영화를 전파한 인물이다.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때 사업차 일본에 온 와타나베는 영화가 큰 인기를 끄는 것을 확인하고 필름과 악사, 변사를 데리고 태국으로 와서 영화사업을 시작 큰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태국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승승장구했다. 이러던 중 조선이 식민지화되는 것을 본 태국의 일본인들은 조선에서 영화관 사업에 뛰어들기로 하고 경성고등연예관을 세웠던 것이다.
이 영화관은 설립 초기 큰 인기를 얻었다. 태국에서 성공했던 방식을 그대로 차용하여서 조선인 변사와 일본인 변사를 함께 두었다. 먼저 일본인 변사가 등장해 영화를 설명하고 이어 조선인 변사가 등장해 영화를 설명한 후 영화를 상영했다. 영화를 두 가지 언어로 각각 설명하다 보니 조선인 관객과 일본인 관객을 모두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연중무휴로 영화를 상영했으며 극장 내에 출장 상영과 사진부를 두어 일부 기록영화를 촬영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1910년부터 1912년 말까지 서울의 영화 흥행은 경성고등연예관이 주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짧은 전성기를 보내고 경쟁 영화관이 등장하면서 쇠퇴하게 된다. 우미관은 조선인 관객만, 대정관과 황금관은 일본인 관객만 받았고 한 가지 언어로 설명했다. 불편하게 조선인과 일본인이 함께 영화를 볼 필요가 없었으며 설명 시간이 줄어든 만큼 더 많은 필름을 볼 수 있었다. 경성고등연예관은 낡은 방식을 쇄신하려 노력하지만 실패하고 결국 대정관의 닛다 고이치가 인수하면서 그 이름이 제2대정관으로 바뀌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경성고등연예관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의미 있는 장소였다. 서울 사람들이 연중무휴 영화를 볼 수 있는 최초의 장소로 1910년대 여가문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특히 이곳에서 일하게 되는 조선인들은 이후 한국영화의 중역으로 성장하였다. 예컨대 경성고등연예관의 변사 서상호는 웅변식의 설명으로 유명했는데 그는 조선 최초의 활동사진 스타였다. 영사기사로 일하던 박정현은 이후 단성사의 경영자가 되었다. 경성고등연예관은 한국영화의 중요 인물들을 배출한 중요한 장소로써 꼭 기억해야 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