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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언 Mar 22. 2021

대정관과 약초극장

한국영화 이야기 8.

2019년 일본에서 왕이 바뀌면서 연호가 평성(平成))에서 영화(令和)로 바뀌었다. 1912년에도 일본의 왕이 바뀌었는데, 이때 명치(明治)에서 대정(大正)이라는 새로운 연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 무렵 지금의 을지로 4가 부근에 새롭게 영화관이 만들어지는데, 그 영화관의 이름은 새로운 연호를 따서 대정관(大正館)이라 부르게 된다. 


대정관은 닛다 고이치(新田耕市)라는 일본인이 지었다. 이 사람은 1910년에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조선에 온 사람이었다. 원래는 미쓰이 물산에 근무하였는데 조선이 식민지가 되는 것을 보고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정리하여 서울로 오게 되었다. 그는 서울에 오자마자 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식민지 개척자금을 대출해주는 금융기관에서 거액을 대출받아 땅을 매집하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은 거액을 들여 땅을 매집하는 닛다를 무모한 사람이라며 손가락질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닛다가 산 땅을 관통해서 지금의 을지로가 뚫리게 된다. 그 당시 일본인들의 중심지인 본정(충무로)은 골목보다 조금 넓은 길에 불과했다. 황금정 길이 뚫리게 되자 그 주변의 땅 값은 폭등하게 된다. 



이러한 무모한 투자는 미리 개발 정보를 알고 있지 않으면 쉽지 않은 투자였다. 사실 닛다 고이치의 아버지 닛다 마타아베는 일본 초대 총리를 지낸 이토 히로부미의 친구였다. 이토가 아직 히로부미라는 멋진 이름 대신 슌스케라는 이름을 쓰던 청년 시기 막부 타도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을 얻어 시모노세키에서 숨어 지내야 했다. 그 당시 이토의 옆집 사람이 닛다 마타베였다. 병든 이토가 혼자 힘들게 살고 있으니까 닛다 부부가 빨래도 해주고, 살림도 도와주고 그랬다. 그걸 잊지 않던 이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막부 타도에 성공하면서 승승장구하였고 결국에는 초대 내각 총리에 임명되었다. 


총리가 된 이토는 시모노세키를 방문해 닛다 부부를 만나 당신들이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내가 돕겠다고 했고 이들 부부는 시모노세키에 천진루라는 여관을 짓게 된다.


1905년 이토가 조선통감으로 임명되어 서울에 부임하게 되자 닛다 마타베도 시모노세키의 천진루를 뜯어 서울로 옮겨 짓는다. 지금의 명동역 부근에 있는 프린스 호텔 자리에 천진루가 있었다. 남산 통감부 밑에 천진루가 들어서니까 그곳은 이토가 매일 술을 마시기 위해 찾는 명소가 된다. 당시 이토의 술 상대는 조선군사령관 하세가와 대장, 헌병사령관 무라타 소장 그리고 천진루 주인인 닛다 마타베였다. 그래서 하세가와 대장과 무라타 소장 사이에 앉은 닛다를 닛다 중장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1909년 이토가 사망하게 되면서 닛다 마타베도 천진루를 큰아들에게 물려주고 은퇴했다. 이때 셋째 아들 닛다 고이치가 서울에 와 고급 정보들이 오고 가는 천진루에서 얻은 정보를 가지고 땅을 매집하게 되었다. 


닛다는 처음부터 영화관을 지을 생각은 없었다. 땅 투기로 큰돈을 번 닛다는 도로로 편입되어 받은 보상금만으로도 모든 부채를 다 갚고 2만 엔이 수중에 들어오게 된다. 이 돈으로 무얼 할까 고민하다가 자기가 근무하던 미쓰이 물산에 가서 상담을 하게 된다. 원래 계획은 석탄 판매업을 할 생각이었다. 산업이 크게 발전하던 시기여서 석탄 수요가 컸기 때문에 괜찮은 사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미쓰이 물산에서는 별로 전망이 없는 사업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고민하게 된다. 이때 오사카 흥행가인 센니치마에를 걷다가 유독 사람들이 버글버글한 곳을 발견하게 된다. 그곳이 활동사진관이었다. 그래서 활동사진업에 대한 조사를 하고 이것이 유망하다는 판단을 갖고 사업에 뛰어든다. 


우선 자신의 땅에 영화관을 짓기로 하고 원래 영화관의 이름을 유락관이라 정했다. 하지만 때마침 연호가 바뀌게 되면서 새로운 연호인 대정이라는 이름을 써서 영화관을 대정관이라 짓게 된다. 닛다가 땅을 매집했던 곳이 지금의 을지로 4가 일대였다. 


닛다가 대정관을 지을 무렵 서울에는 경성고등연예관이 유일한 상설영화관이었다. 경성고등연예관이 조선인과 일본인 관객 모두를 받아서 영업하고 있었지만 언어가 다른 두 부류의 관객들을 함께 수용한다는 게 조선인이든 일본인이든 관람에 불편한 부분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새롭게 들어선 대정관은 오로지 서울의 일본인 관객들만 받았다. 대정관이 등장하면서 서울의 일본인 관객들을 쓸어갔고 여기에 일본의 영화 트러스트 회사인 닛카츠의 대리점으로 있으면서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영화들을 독점적으로 수입, 상영하게 된다. 이를 바탕을 닛다는 지방의 영화관들을 체인으로 두고 조선에 자체 배급망을 형성하면서 1910년대 조선의 영화 흥행계를 장악하게 된다.


사업을 계속 확장해 나가던 닛다는 일본의 영화회사들이 조선에 직접 투자하여 배급망을 형성하기 시작하게 되자 극장업이 일정한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주식 중매업에 전념하게 된다. 그는 1920년 경성주식현물취인소, 지금의 주식거래소가 만들어졌을 때 발기인 중 한 명이었다. 영화관 운영은 형제들에게 맡겼다. 큰형은 천진루를 경영하고 있었고, 동생은 인천의 표관을 운영했고 바로 위 형에게 대정관을 맡겼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대정관을 오복점을 경영하던 오카모토라는 사람에게 매각해 버리게 된다.



닛다가 영화관을 매각한 게 갑작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그 이유는 대정관이 배급하던 닛카츠 영화를 닛카츠에서 인수한 희락관에서 상영하기로 하면서 대정관은 닛카츠 측과 갈등을 빗게 된 것이 주된 이유였다. 이후 쇼치쿠 영화를 상영하게 되지만 닛다는 영화관 운영에 흥미를 잃게 된 것 같다. 


약초극장에서 스카라극장으로

주인이 바뀐 대정관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1910년대 대정관은 조선의 영화산업을 주도하던 영향력 있는 영화관이었지만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여러 영화관 중 하나로 전락하게 된다. 여기에 영화관들이 새로 생기면서 대정관은 서울의 가장 오래된 낡은 영화관의 대명사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치쿠 영화회사가 좋은 영화들을 만들어내면서 쇼치쿠 영화를 상영하는 대정관에는 여전히 관객들이 많이 들었다. 그런데 토키 시대가 되면서 문제가 생긴다. 쇼치쿠에서는 큰 비용을 들여서 토키 영화를 만들었는데 서울의 대정관에서 이 영화를 상영할 때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거나, 시설이 너무 열악하여 관객들의 불만이 쏟아졌던 것이다. 쇼치쿠에서는 경성 개봉관을 대정관에서 다른 영화관으로 바꾸기로 한다.  대정관 운영자들은 큰 충격을 받게 되어 부랴부랴 영화관 신축을 결정하게 됩니다. 



대정관이 있던 곳에 건물을 다시 짓는 것은 불가능했다. 대정관이 처음 들어섰을 때는 주변에 건물이 없고 대정관이 우뚝 솟아 있었는데 20여 년이 지나 1930년대 중반이 되니까 대정관 주변으로 건물들이 꽉 들어차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부지가 너무 좁아 건물을 신축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대정관이 있던 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 부지를 마련해 영화관을 신축하기로 하고 새로운 부지가 약초정에 있었기에 영화관의 이름을 대정관이 아닌 약초영화극장으로 짓게 된다.


1930년대 중반 신축한 약초극장은 도호영화사의 전신인 PCL 영화를 상영하게 된다. 당시 약초극장은 서울의 가장 시설 좋은 영화관이었다. 하지만 쇼치쿠나 닛카츠 같은 큰 영화회사의 영화를 상영하지 못하면서 일정한 한계를 갖게 된다. 그러나 PCL이 도호영화사로 성장하고 도호 영화가 약진하면서 금방 자리를 잡게 된다. 


1937년 중일전쟁이 벌어지고 필름이 부족한 상황이 계속되면서 어트랙션이 강화되었다. 이를 전문적으로 공연하기 위해 신흥악극단에 극장을 빌려주었다가 차제에 극장 안에 악극단을 설치한다. 그 악극단이 약초악극단이다. 이 무렵 악극단이 인기를 끌면서 영화 상영을 하지 않고 악극 전용 극장으로 바뀌게 되고 그런 상황에서 해방이 된다. 해방 후 약초극장은 이름을 수도극장으로 바꾸었다가 주인이 바뀌면서 스카라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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