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선에 두 발로 선다는 것

KUMA미술관 기획전 《여우창문》

by 박상은


검은 선에 두 발로 선다는 것: KUMA미술관 기획전 《여우창문》 작성자 박상은


2017년 계원예술대학교의 부속기관이던 ‘갤러리27’은 경기도지사의 승인을 받아 경기도 사립미술관 ‘KUMA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KUMA미술관은 지역사회와 시민들, 학교 내 구성원들에게 다양 한 시각적 경험을 약속했다. 그러나 코로나-19 이후 KUMA미술관의 예산이 줄어들었고 이전처럼 다 양한 지역사회와의 협업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후 이 미술관은 점점 성과 보고를 위한 전시만 으로 일 년 일정을 채우게 되었다. KUMA미술관은 학교 입구에 자리 잡고 있지만 로비의 역할을 수행 하지는 않기에 학생들은 일 년에 과제 전시를 전시하기 위해 하루나 이틀 정도 그곳에서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그렇기에 KUMA미술관은 계원예술대학교 구성원들과 그리 친숙한 공간은 아니다. 으레 미술 관이 그렇듯 전시가 없을 때 미술관의 문은 쇠사슬로 닫혀있는 것이 당연했기에 이곳은 시간이 지날수 록 점점 우리와 멀어지며 이해관계에 따라 사용되고 다시 문을 닫는다. 이때 이해관계란 필요할 때만 이곳의 문을 열고 조명을 켜는 일을 말한다. 전시를 수행하는 학생들은 미술관의 특성, 맥락을 전혀 이 해하지 못한 채로 각자 작업실에서 만든 전시품을 미술관 내에서 대출할 수 있는 좌대 위에 얹혀놓을 뿐이다. 이곳은 미술품만을 돋보이게 하는 화이트큐브로서 억지로 기능하고 있지만, 분명히 화이트큐브 가 아니다. 계원예술대학교의 전시 대안공간이자 부속기관이다. 그 맥락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겠는가?


《여우창문》에서는 미술관의 기능이 정지될 때, 이 사면의 벽을 뚫고 작품으로 돌진하는 빛을 강조하 고자 한다. 두 작가는 미술관에 채광을 이용해 학교라는 이름의 이전, KUMA라는 이름의 이전 이 사 면의 공간을 탐색하고자 한다. 미술이라는 주술적 행위를 통해 신체로 만든 틈을 통해 완전무결한 하 얀 벽 사이를 벌려 틈을 통해 엿보기를 시도한 것이다. 그렇게 만든 그 틈으로 정예준은 유리창을 발 견했다. 미술관은 한 면이 통유리창으로 되어있다. 미술관에 관심이 없더라도 그 사실은 누구나 쉽게 알아채기 쉽다. 그러나 고개를 들지 않는다면 미술관의 천장에 창문이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기 어렵다. 전시에 참여한 정예준은 계원예술대학교를 졸업하고 영상제작실의 조교로 지내며 미술관의 관 리 업무를 맡은 적이 있기에 이 유리창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유리창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했다. 전시 전날 정예준은 유리창에 내려앉은 솔잎 더미와 성에를 제거했 고 그 위에 스테인드글라스 조각이 설치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유리창 아래 미술관 바닥을 변화 시키는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유리창으로 드는 빛은 또렷하지 않았다. 미술관 직사광선이 전혀 들지 않았고 더불어 유리창 위로는 소나무들이 가지를 치고 있었기에 더욱 미술관으로 드는 빛은 희미했다. 이에 그는 통유리창을 가릴 수 있는 블라인드의 일부를 내리고 원형 유리창을 투과하는 희미한 빛을 강조하고자 미술관을 더욱 어둡게 했다.


같은 계원예술대학교의 졸업생으로 현재는 전업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이해성은 분기마다 전시라는 이벤트를 수행하고 결과 발표를 해야 하는 이 미술관에 회의를 느끼며 졸업 전시 이후 버려진, 한때는 미술품이었거나 미술품의 한 부분이었던 폐물들을 모아 미술관에 일시적으로 둥지를 틀기로 했다. 미술 관의 통유리창 바로 앞에 서로를 의지하며 임시로 기대어진 폐물들 틈으로 빛이 들어 바닥에 폐물의 음각인 그림자가 생기기를 기대했으나 역시 직사광선이 들지 않았던 탓에 기대했던 것처럼 폐물을 통 과하는 그림자는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 기대와 의도는 상상 속의 미술관을 깨뜨리는 데 일조했다. 실제로 작가들은 작품이 설치되고 난 후에 미술관이 직사광선이 작업과 미술관 바닥과 벽의 대비를 뚜 렷하게 만들 만큼 들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 실제로의 공간을 마주한 순간, 상상으로 했던 미술관이 붕괴하고 이 공간 자체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빛을 매개로 미술관 이전의 공간을 드러내




고자 했던 두 작가조차 실제로 미술관의 빛이 어떠한지는 상상으로 추측했을 뿐이었다. 미술관은 시간 이 지날수록 어두워졌고 가끔 지나가는 자동차의 전조등 불빛만이 작품들을 비출 뿐이었다. 미술관은 조명이 꺼져 미술관의 기능이 정지되었고 오히려 기대했던 자연광조차 들지 않자 실제로 이 부지, 이 땅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귀신이 앞에 드러나는 순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상상하지 못했던 공간의 특성이 눈앞에 섬뜩하게 다가와 펼쳐졌다. 이곳이 이렇게 어두웠던 적이 있었나? 작업 은 작가가 만든 스테인드글라스, 학교 곳곳을 돌아다니며 수집해 온 폐물들로 인해 여우창문이 되었고 그것을 투과하는 빛으로써 드디어 KUMA미술관의 어둠, 전시 기획 당시 고려되지 못한 특성이 그 모 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귀신이다. 모서리마다 존재하는 진한 어둠.


미술관에 충분한 빛이 들지 않았고 그로 인해 그들은 어둠 이 더욱 절실해졌다. 그러던 와중에 학교의 관계자가 찾아왔다. 그는 미술관의 유지보수를 위해 전시 일정을 물었고, 비어 있는 일 층과 이층 공간 을 차례대로 둘러본 후에 한쪽에서 보수를 진행해도 되겠냐고 한 작가에게 물어왔다. 그리곤 철수 일 정을 앞당길 수 있는지 물었다. 일정 축소는 어렵다는 답변을 들은 관계자는 돌아갔다. 그는 사전 준비 와 사전에 많은 협의가 필요한 전시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업무를 착실히 수행하는 내부 관리자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거시적 인 관점에서 읽을 수 있다. 그에게 이곳은 과연 미술관인가? 그저 유지관리하고 문서를 작성해 완료 보고를 해야 하는 페인트가 벗겨진, 울퉁불 퉁 금이 많은 곳인가? 계원예술대학교 학생들의 과제를 평가하고 전시를 수행하는 능력을 가늠하는 평 가의 장인가? 수많은 추측을 할 수 있지만 그전에 이 미술관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경기도지사의 인 증을 받은 사립미술관이다. 우리 계원예술대학교 학생들은 삼 년 동안 분기마다의 과제 전시를 이곳 KUMA 미술관을 통해 치르면서 많은 제약 위에 발을 걸치고 아슬아슬하게 전시를 해왔었다. 학교라는 장소의 특성상 학생이 다치면 많은 서류가 오고 가야 하므로 미술관에서 조금이라도 위험한 행동은 허 락되지 않았다. 이런 절차로 인해 KUMA미술관은 학생들의 샌드박스로서 기능할 수 있다. 그러나 어 느 때보다 미술관은 화이트큐브를 지향한다. 학교 미술관 이라는 정체성을 지우고, 콘크리트 벽이 노출 되어 있고 한쪽 면이 유리창으로 들어서 있다는 것을 지우기 위해 환히 조명을 켜고, 좌대를 꺼내고 가벽을 꺼내 그럴싸한 화이트큐브의 모습으로 위장하는 것은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이곳에서 생기는 책임을 균등하게 학생과 분배하는 것은 어렵다. 학교의 부속기관임을 인정하며 학생들이 전시장에서 작 업을 설치하는 것을 안전하게 배울 수 있는 공간임을 인지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미술관의 역할 을 한정 지을 수 없다. 역할의 끝을 정해놓는다는 것은 이곳에 출몰하는 귀신을 못 본 척 지나가는 일 이다. 귀신의 존재를 지울 수는 없다. 어둠은 조명을 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불을 끄면 다시 돌아와 문서 대신 이곳을 기록할 것이다. 공간 안에 작업이 없어도 콘크리트 벽은 무너지지 않으며 유리창은 산산조각이 나지 않는다. 비단 모두에게 소외된, 갈피를 잃은 이 가여운 미술관을 다시 부흥시키자는 뜻이 아니다. 이 전시는 모금 행사가 아니며 어느 이해관계에서 출발하는 전시도 아니다. 그저 더 나은 예술을 할 수 있는 환경을 교육기관이 갖춰야 하며, 예비 작가들은 전시 공간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 며 작업을 실행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처음 끌어내고자 했던 질문으로 돌아가 출발 하자. 다시 글에서 눈을 떼고 둘러보자. 이 미술관이 이렇게 어두운 적이 있었는가?



이 글은 2025년도 겨울방학에 KUMA미술관에서 진행된 ⟨여우창문⟩의 비평을 옮겨적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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