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 두 손을 펼친다. 열 개의 손가락이 보인다. 꼼지락거려본다. 모두 잘 움직인다. 중지와 검지를 모아 동그라미를 만들어보기도 하고 손가락을 이리저리 포개고 엮어보기도 한다. 이 작은 틈으로 어떤 것과 눈이 마주칠 수 있을까. 다른 무엇보다 나의 신체로 그것을 보려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나의 신체 로, 나의 손가락으로 미지의 것을 쓰다듬으며 빛을 맞이하는 것. 손가락 틈을 통과한 빛이 땅에 닿고, 그 바닥에 희끄무레하게 맺히는 상을 물끄러미 오랜 시간동안 노려본다.
전시의 제목인 <여우창문>은 일본 동화에서 파생되어 강령술로, 자신의 손가락으로 지정된 패턴을 만 들고 그 손틈 사이로 세계를 바라보면 맨 눈으로는 볼 수 없던 것들을 볼 수 있다는 일종의 괴담이다. 강령술이란 대게 준비물을 필요로 한다. 인형이나 쌀, 칼과 같은 무기, 영적인 기운이 깃든 노트나 영 물로써 귀신을 불러낸다. 그러나 여우창문은 영물이 아닌 자신의 신체인 손가락으로 귀문을 열어 귀신 을 살필 수 있다. 여우창문의 두 작가는 자신의 손가락 즉 신체로, 고행과 시간성이라는 재료를 통해 작품을 만들었다. 그 작품들은 각기 하나의 여우창문으로써 이 곳에 원래 존재하는 것, 원래 존재하던 것을 빛을 통해 투영해 바라보고자 한다.
두 작가는 계원예술대학교의 졸업생이다. 쿠마 갤러리는 이들에게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다. 학생들은 예술대학교 성과 보고와 커리큘럼으로 일 년에 최소 한 번은 쿠마 갤러리에서 과제전을 해야 했지만, 전시가 없을 때 갤러리의 문은 항상 닫혀있기 때문에 특별한 사정이 있지 않고서야 갤러리 안 을 드나들 일이 없다. 이 곳은 전시 외에는 용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곳은 이해관계에 따라 이용된다. 이때 이해관계란 필요할 때 이 곳의 문을 열고 조명을 켜는 일을 말한다. 갤러리가 필요 없 을 때는 쇠사슬로 문을 걸어 잠구고 그 안의 비품만을 관리한다. <여우창문>에서는 갤러리에 달려있는 조명을 쓰지 않고 통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자연의 빛만을 이용한다. 갤러리의 기능이 정지될 때, 이 사 면의 벽 안 쪽에 본래 숨어있던 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려 한다.
그 탐구의 과정으로 이해성은 빛으로써 분간되지 않은 어둠을 전시한다. 입구에서 보이는 모니터에 비친 검은 거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관객,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검은 거울을 통해 관객은 전시의 맥락에 편입됨으로써 환영받는다. 검은 거울은 어두운 이 곳의 풍경이었고 밝은 빛 때문에 오 래 들여다보지 않으면 쉽게 지나칠 수 있다. 빛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그의 작업을 연달아 관통할 수 있다. 그는 전시 이후에 학생들이 버려놓고 간 작품이나 폐물들을 주워와 전시공간에서 아무런 설계도 없이 쌓거나 포개어 놓는다. 통 유리창 앞에 놓인 더미들로 빛이 전진하다 충돌하거나 반사되거나 그 대로 통과하여 바닥으로 떨어져 일그러진다. 또한 갤러리에서 발생하는 소음을 녹음하고 전시장에 플레 이함으로써 갤러리의 기능을 중첩시킨다. 전시장은 기능이 정지된 상태에도 여전히 건재할 것이다. 정 예준은 학교를 졸업한 이후 영상 조교로 취직하여 오랜 시간을 이 학교에서 보내왔다. 올해 삼월, 오랜 학교 생활을 마치면서 그가 주목하는 부분은 자신이 시간을 보낸 계원예술대학교라는 장소보다 더 그 이전의 시간이다. 그는 계원예술대학교 이전의 이 땅을 파고 들어간 콘크리트 기둥과 이 부지에 대한 사념을 떠나보내려 한다. 그것의 첫 번째로 쿠마 갤러리 천장에 붙은 각각 두 개의 유리창을 손수 닦 아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빛이 통과해야 하는 유리창의 기능을 복원하고 벤야민의 유년 시절 독일에서 있었던 에세이 중 ‘크리스마스 천사’에서 벤야민이 본 나무와 그가 들었던 아기예수에 대한 속삭임을 스테인글라스와 유리 위에 앉아있던 솔잎으로 만든 글자, 이 두 가지를 닦은 유리창 위에 놓는 것으로 작업을 완성한다. 이렇게 작업을 통해 우리는 이 곳의 원래 주인을 마주할 수 있게 되며 그것을 통해 미지의 것을 볼 수 있거나 상상해볼 수 있다.
이 글은 2025년 겨울방학에 계원예술대학교 KUMA갤러리에서 진행된 ⟨여우창문⟩의 서문을 옮겨적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