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까지 갔으면, 독도도 가야지', '지리산에 올라갔으면, 천왕봉 일출은 봐야지.'라고 생각하는 천생 모험가 체질의 일행이 '제주도까지 왔으니 최남단 마라도에 가보자'라고 했다. 때로는 나도 그의 체질을 닮았다고 느끼지만, 아직 그를 따라가기엔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제주도 가운데를 가로질러 쭉 내려갔다. 한 시간을 넘게 운진항을 항해 차로 내달렸다. 여객선 터미널에 도착해 매표를 하려고 했지만, 오늘의 배 예약은 모두 마감되었단다. 탈 수 없는 여객선 근처를 배회하면서, 허탈함과 아쉬움을 머금었다. 가장 기대했던 그 일행은 서울 올라가기 전에 꼭 다시 오겠다고 마라도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생각한 대로 일이 이뤄지지 않을 때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좌절하거나 그 상황을 피하려고 든다. 감정을 소모하고 회피한다고 해서 상황이 바뀌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근심과 걱정이 자신을 사로잡을 뿐이다. 최대한 빨리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힘은 어디서 올까? '지금 주어진 상황을 인정하고 용납하는 것'에서 오는 것 같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처럼 아프다. 그렇지만 아픔의 크기보다 다가올 성장의 힘이 더 크다.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잠시 다른 새로운 일을 생각해보자. 삶은 모험이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대로 이뤄지지 않을 때도 있을 테지만, 내 생각대로 이뤄질 때도 있는 법이다. 생각대로 이뤄질 때를 찾아서 부단히 떠나야 할 것이다.
이왕 남쪽까지 온 거 제주 남쪽의 해안을 따라 달리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용머리해안과 산방산을 차창으로 바라보며 마음을 달랬다. 이윽고 산방산과 바다 가까이에 있는 작은 마을, 화순에 도착했다. 산지 재료로 정성껏 요리하는 가성비 좋은 식당이라는 점에 끌려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식과함께
식과함께,
갈치정식, 성게 미역국정식, 보말칼국수, 해물라면 등이 1인분에 9,900원이다. 만원의 행복을 찾는다면 이곳에 가야 한다. 보통 갈치조림이나 구이를 먹으려면 2인분 이상을 주문해야 하는데, 이곳은 각자 원하는 메뉴를 1인분씩 시켜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혼자 여행 온 사람들도 부담 없이 먹고 갈 수 있는 곳이다.
우리는 갈치조림, 보말칼국수, 갈치정식을 주문했다. 밑반찬이 먼저 올려졌다. 제주 하면 고사리와 무가 대표적인데, 밑반찬으로 이 둘을 다 맛볼 수 있어 좋았고 다른 반찬들 모두 정갈하고 맛있었다. 차례대로 음식들이 상에 올려졌는데, 한 데 올려진 모습이 제주도 그 자체였다. 제주도 대표 음식의 총집합이었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느낌이었다.
갈치 정식은 '갈치구이+고등어조림+성게 미역국+공깃밥'으로 구성되었다. 인심이 좋으신 사장님 덕분에 저렴한 가격에 제주도 해산물을 다양하게 먹어볼 수 있었다. 보말칼국수는 지난번 먹었던 '한림 칼국수의 매생이 국물'이 아닌 미역 국물로 맛을 냈다. 보말과 함께 끓여낸 미역 국물의 칼국수는 고소하고 맑은 맛이 느껴졌다. 갈치조림의 칼칼하고 달달한 양념은 밥도둑이 따로 없다. 양념이 스며든 무와 갈치가 입을 즐겁게 해 주었다.
식과함께의 갈치조림(좌), 보말칼국수(위), 그리고 갈치정식(아래)
우리 집은 한 끼를 먹을 때 밑반찬이 5-6개 이상이다. 반찬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랑받는 기분이 들고, 다양한 반찬의 식감을 비교하는 재미도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다 먹고 나서 오는 힘이 한 그릇 요리보다 더 강하고, 힘이 오래 지속되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집 밖에서도 백반집을 찾아가는 걸 참 좋아한다. 제주도에서 정성스럽고 깔끔한 가정식 백반집을 잘 찾아온 것 같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뻗어 있는 산길을 따라 굽이굽이 올라가다 보면, 넓은 들판의 골프장들이 보이고 한적한 곳에 지어진 박물관과 미술관이 모여 있다. 그 옆에 정말 멋스러운 건축물이 하나 있다.
방주교회
방주교회,
2009년 이타미 준이라는 재일교포 건축가가 지은 건축물로써 노아의 방주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수직으로 뻗어 있는 창이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듯하고, 모자이크로 꾸며진 지붕은 보는 각도에 따라서 다른 빛깔을 내었다. 건물 주위를 둘러싼 물 위에는 햇빛이 가득히 비친다. 양쪽 끄트머리에 새겨진 십자가를 보니 사뭇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건축가 이타미 준은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평생 한국 국적을 유지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는 제주도에서 포도호텔(2001), 수·풍·석 미술관(2006), 그리고 방주교회(2009) 3가지 대표 건축물을 만들었다. 본토를 떠나서도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디아스포라 건축가'로 불리며, 세워질 지역의 특성을 살리고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건축으로 유명하다. 한국의 정체성을 힘껏 담아 지은 그의 작품들이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말은 성경에서 유대민족이 외부 집단에 의해서 추방당한 것에서 유래했고 그 뜻은 '흩어짐'이다. 요즘 '외부 환경에 의해 흩어져서 살게 되는 것'에 대해서 특히 많이 생각하게 된다. 예전의 삶에 대한 그리움은 외로움으로 발전하고,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며 적응하지 못하는 답답함이 있다. 다시 예전에 살던 대로 돌아가지 못할까 봐 두렵고 불안한 마음도 있다. 이러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은 맹목적이고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선택적이고 주동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나를 잃지 않기로 스스로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 처해있을 지라도 나라는 존재가 바로 서 있다면, 뭐든 이겨낼 수 있다.
올리브카페
올리브카페,
방주교회를 마주하고 있는 카페이다. 잠시 이곳에서 쉬었다 가기로 했다. 창가에 앉아 따뜻한 커피와 통팥, 녹차 양갱을 먹으며 정면에 있는 건축물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고요하고 한적한 카페에 잔잔한 음악이 흐른다. 숨 가쁘게 남쪽으로 달려왔던 조급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평온한 마음으로 만들어 주었다.
카페 안에는 6개월 후에 엽서를 보내주는 느린 우체통이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은 바로바로 톡으로 보낼 수 있는 지금을 살고 있지만, 진심이 담긴 말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깊어지는 것 같다. 여행지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 생각을 글로 담아 전하는 것은 받는 이뿐만 아니라 보내는 이에게도 참 의미가 있고 몇 배의 감동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여전히 느리고 오래된 것을 사랑하는 아날로그인이다.
해가 저물어갈 무렵, 하늘이 빨갛게 물들기 전에 자연의 경치를 즐기러 가기로 했다. 바람이 적당하여 날씨도 선선하고 산책하기 참 좋은 때에 맞춰 갔다.
천지연폭포
천지연폭포,
우리 부모님의 신혼여행지이자, 내 학창 시절의 수학여행지였던 곳이다. 비록 그때의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직접 와서 보니 '그때 왜 이곳에 와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입구에 있는 다리 위에서 바라본 나무와 맑은 물의 풍경에 눈이 멈춘다. 흐르는 물은 거울이 되어 나무들이 물에 그대로 비쳐 있다.
폭포를 향하는 길은 하나같이 다 아름답다. 주렁주렁 빨간 열매를 맺은 나무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벚꽃 나무가, 노란색과 초록색의 그라데이션을 이루는 이파리들을 가진 나무들이, 그리고 하늘과 나무들 사이의 경계에 걸려있는 붉은 노을까지도.
천지연폭포
'천지연'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늘과 땅이 만나 이루어진 연못'이라고 한다. 폭포의 길이가 약 22m, 그 밑의 못의 깊이가 20m라고 하니 위아래로 만나 있다는 뜻이 맞는 것 같다.
'솨아아아-' 폭포 소리에 따라서 '와아아아-'소리도 질러보고, '만세!'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려 보기도 한다. 폭포 앞에 있는 돌 위에서 마치 이곳이 나만의 것인 듯이 만끽하면서 실컷 사진도 찍었다. 상쾌하고 즐거운 기분이 들게 하고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주는 폭포다.
천지연폭포
나는 여행을 가면 줄곧 현지 전통시장은 꼭 일정에 넣는다. 현지에서 나는 야채와 과일, 고기와 해산물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도 하고, 내가 살고 있는 곳과 가격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도 해보고, 사고 싶은 물건이 생기면 흥정도 해보는 재미가 있다.
서귀포매일올레시장,
1960년에 형성된 유구한 역사를 가진 제주의 대표 전통시장이다. 서울 남대문시장이 1964년에 형성되었는데, 남대문시장보다 4년 앞서서 지어진 곳이구나. '서귀포매일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고, 2009년 제주올레 6코스에 포함되면서부터 '서귀포매일올레시장'이라는 이름이 되었다. 60년의 세월 동안 시장의 모습은 현대적으로 발전했다. 아케이드 시설과 공영주차장이 설치되었고, 보행 통로도 무척 넓어졌다. 전통과 현대 그 사이에서 조화로운 공존을 이루고 있는 시장의 모습이었다.
시장을 둘러보면서 구매한 것 중 하나는 '제주 말린 무말랭이'였다. 제주도에서 귤 다음으로 많이 나는 것이 무라고 하는데, 천혜의 자연에서 자라나는 제주의 무는 시원하고 아삭한 맛이 일품이라 전국적인 사랑을 받는다. 일행은 시장에서 한 할머니가 파시는 직접 말린 무말랭이를 보고 '서울 가면 아주 맛있는 무말랭이를 만들어 보겠다.'라고 한다. 무말랭이 한 봉지에 오천 원, 두 봉지를 바리바리 비장하게 들고 갔다. '밥 한 숟갈에 무말랭이 한 점만 올려 먹어도 참 맛있는데.'
서귀포매일올레시장
우정회센타,
제주도에 왔다면 마땅히 먹어야 하는 것이 해산물이고 회라고 생각한다. 시장에서 먹는 회가 가장 싱싱하니 오늘은 여기서 먹어보기로 했다. 여기저기 둘러보다 가장 합리적인 가격과 적지 않은 손님이 있는 횟집이라고 생각되어 들어가게 되었다. 먼저 입맛대로 모둠회를 조합해 만들어주는 게 좋았다. 워낙 종류가 많아서 무엇을 꼭 먹어야 할지 심히 고민이 되었다. 결국 '참돔+광어+고등어' 모둠회와 해산물 모둠 스페셜 '딱새우+문어+멍게+해삼+전복'을 주문했다.
회 한 점을 들어보니 살이 두툼하다. 물고기나 육고기나 모든 고기들은 두툼해야 맛있는 것 같다. 삼겹살도 대패삼겹살보다 통삼겹살이 더 맛있는 것처럼, 회도 두툼하니까 더 맛있다. 상추쌈에 막장을 바르고 회 한 점씩 올려먹으니 금방 배가 부르다. 특히 고등어회와 딱새우회는 제주에서만 맛볼 수 있는 별미 중에 하나다. 비린 맛없는 고등어회와 김이 뿌려진 주먹밥을 함께 먹으니 환상의 맛이 따로 없었다. 딱새우회는 쫄깃하고 달달한 맛이 났다. 신선하고 푸짐한 해산물 파티에 눈과 귀가 모두 즐거웠다.
우정회센타의 모듬회
돌이켜보면, '마라도에 가보자'하고 시작한 오늘의 일정은 마라도 없이도 의미 있게 보낸 것 같다. 마라도에 가기 위해서 제주도 남쪽까지 내려온 덕분에, 남쪽에 있는 좋은 장소들을 다 둘러볼 수 있었다. 마라도를 가지 못했다고 실망하는 것은 잠깐이었고, 그 이후의 모든 일정은 정말 최고였다고 생각한다.
생각한 대로 일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좌절했지만, 생각하지 못한 때에 새로운 일로 인하여 기뻐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일 중요한 건 나 자신이 모든 상황 속에서 온전히 살아 있는 것, 상황이 힘들고 어려울 지라도 자신을 지켜내는 것이었다. 결국 자신을 잃지 않는다면 좋은 일이 오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