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워밸을 위한 칭찬 방법
이직한 새로운 회사에서 어느덧 2년의 시간이 흘렀다. 한군데에 오래 앉아있는거라곤 꼴랑 글쓸 때 외에는 없는 내게 이 회사는 지낸 시간 이상의 정을 들게 만들었다. 매일매일 새로운 경험과 스트레스를 한번에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사람이 빠져나가긴 해도, 나는 적당히 흔들리며 이곳의 가장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늘 그렇듯 올한해도 이렇게 버틸셈이다. 그렇지만, 도무지 버티지 못하는 것들이 있기도 하다. 가령, 내가 나를 온전히 잃어버릴 수 밖에 없는 일들 말이다.
워라밸 말고, 워워밸(워크앤워크 밸런스)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는 광고회사다. 워라밸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업종이다.(회사마다 다르겠지만, 아직까지 많은 광고대행사는 워라밸을 찾기 힘든건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래 '대행사'라는 드라마로 광고회사에 대한 많은 이들의 관심이 늘어났지만 내가 다니는 부티크 광고회사엔 통하지 않을 얘기다. 얼마전에는 워라밸을 찾기 위해 우리 회사에 지원했다는 한 지원자를 웃으면서 돌려보냈을 정도다.
웃프지만 워라밸은 우리 회사에 아니 앞으로 이업종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지 않을까 싶다. 주말을 앞둔 저녁에도 월요일 아침을 맞이하는 직전까지도 밤새 불켜고 전쟁을 하는 사람들이 차고 넘치는 업종이니까. 나는 여기서 패잔병의 역할을 주로 도맡고 있다. 적당한 카페인과 포션을 먹이고 나면 대충 휘적거리면서 일을 하다가 다시 푹 쓰러지는 그런 패잔병. (a.k.a 좀비) 제법 규칙이 생긴거라면 적당히 살아나는 법이나, 적당히 죽은척 하고 있는 법을 익혔다 정도다.
이정도 익혔다는 것은 워크 앤 라이프의 밸런스가 아닌 워크 후 워크를 또 할 때를 대비하는 밸런스가 생겼다는 '맷집'이라고 이해해도 좋다.
워워밸을 위한 돼지껍데기와 소주
비딩시즌을 제외해도 간간히 철야도 있고, 빈번하게 야근이 있는 광고대행사. 일을 좋아해서 망정이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아직 미련이 남아서 그런거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곳에 터줏대감인냥 2년동안 망부석처럼 앉아있다.
이런 맷집을 유지하기 위해선 식습관이 꽤나 중요한 편인데, 워워밸을 지키는 나로써는 우여곡절 끝에 먹는 돼지껍데기와 소주가 가장 큰 힘이여라. 도무지 참을 수 없는 날에는 일이고 나발이고 다 벗어던지고 인근 고깃집에 가서 돼지껍데기를 구워 먹는다. 혼자 먹든 둘이 먹든 어쨌든 알딸딸하게 먹고 나면 하루가 허망하게 지나간거 같아 울적하다가도, 고요한 밤길을 휘청휘청 걷고 있으면 또..진즉에 이렇게나 먹고 취해버리면서 살걸 싶다.
대행사의 일을 사랑하고, 아끼지만 도무지 사랑할 수 없고 나를 잃어버릴 수 밖에 없는 순간이 찾아올때마다 나는 종종 길을 잃은 개처럼.. 그렇게 취해서 집에 간다. 이렇게 돼지껍데기와 소주에 내가 의존하는 이유는 씹다보면 또 이해가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돼지껍데기를 오물 오물 씹고, 쓰디쓴 소주 한잔을 넘기고 나면 내가 이해할 수 없던 그날의 일도, 내 태도도, 내 마음도 이해가니까. 밉디 미운 광고주도, 나에게 잔소리하는 대표도, 내 속을 썩게 만드는 회사의 모든 일들도.. 그냥 오물오물 씹다보면 이해 가니까. 그러니 거를 수가 없다. 이렇게나 쉽게 이해가 가는데, 어찌 워워밸을 위한 일용한 양식을 거두겠는가.
힘들다고 돼지 껍데기와 소주를 거르지 마세요
그러니 거르지마세요, 라고 단언컨대 말하고 싶다. 고작 세상사 힘들다고 돼지껍데기와 소주를 거를 수는 없는 법.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가서라도 먹어줘야 하는 돼지껍데기와 소주. 그리고 약간의 나를 위한 칭찬은 필수다.
자리에 앉자마자 불판을 올리고 점점 말려가는 돼지 껍데기를 보면서 한시름 놓아버리면 그만. 나에게 호통치던 광고주들의 모든 목소리가 껍데기의 끝자락에 말려 올라가는 걸 느낄 수 있다. 내 속을 뒤집어 놓는 회사 생활도 껍데기의 냄새에 호로록 넘어가니, 생각해보면 이리도 달달하고 행복한 순간이 어디 있겠으랴.
꼬들해진 껍데기를 콩고물에 묻혀 앙 하고 씹고, 소주 한잔을 탁 털고 나면 나도 모르게 절로 이런말이 튀어나온다. 어차피 내일도 전전긍긍할테지만 속 시원하게 내뱉고 나면 또 그렇게 기운을 얻으니까.
"아 그래, 될대로 되라 해. 내가 못한게 뭐가 있는데! 감히 내가 이렇게나 잘해버린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