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 필요했다

by 박상하

마루에 비친 햇살이 눈부시다. 창밖 새파란 하늘에는 구름이 흘러간다. 저만치 태백준령 위에는 짙은 먹장구름이 몰려 있다. 지금 저곳에는 눈이 내리고 있을까. 강릉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날씨가 바뀐다. 집을 구할 때 만난 부동산 사장님은 “독특한 기후 때문에 기상청 본청이 여기 있다”며 자랑했다. 강릉은 궂은 날씨일 때도 서울처럼 종일 먹먹한 회색 하늘을 드리우는 대신 아침저녁 잠깐씩이라도 푸른 하늘을 보여준다. 아마도 이곳 사람들은 날씨 때문에 우울해하지는 않으리라.


5년 전, 장인어른께 갑작스레 황달이 비쳤다. 늘 조금 과할 만치 원기 왕성하던 분이셨다. 진단 결과는 담도암. 수술 시기는 이미 놓친 상황이었지만 마침 아버님 고교 동창 L 박사님과 인연이 닿았다. 이름난 외과 의사셨다. 수술은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자정이 거의 다 되어서야 수술실 문이 열렸다. 종일 수술을 집도한 박사님 얼굴은 시커멓게 그늘져 있었고 걸음은 쓰러질 듯 위태로웠다. 그분도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였다. 차마 환자 상태를 여쭤볼 수 없었다. 그저 “고맙습니다” 고개 숙여 인사할 따름이었다.


아버님의 회복력은 놀라웠다. 큰 수술 후에는 다음 날이 지나서도 의식을 되찾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던데 아버님은 중환자실로 옮기는 도중 의식이 돌아왔다. “춥다” “아프다” 말씀하실 수 있었다. 불과 몇 달 뒤 아버님은 이전의 모습을 되찾으셨다. 운동에도 열심이셨다. 호리호리하던 체형이 조금 더 홀쭉해진 것을 눈감는다면 주변 사람들이 그분에게서 큰 병의 흔적을 찾기는 힘들었다. 고교 동창회 사무실을 부지런히 오가시더니 덜컥 동기회장이 되셨다. 친구들에게 밥도 후히 사고 계절 모임도 즐겁게 참여하셨다. 평소 타보고 싶던 차도 구하셨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안면 있던 병원장께서 슬쩍 귀띔해 주셨던 말이 떠올랐다. “저런 큰 병은 보통 3년 정도”라며 말끝을 흐렸다. 3년 후 암은 이곳저곳 다른 장기를 침범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손 쓸 도리가 없었다. 아버님은 언제나처럼 삶이 영원히 이어질 것처럼 하루를 사셨다. 입원실 옷장 아래에는 퇴원할 때 신을 거라 하셨던 빨간 캔버스화가 준비되어 있었다. 돌아가시기 전날에도 거뜬히 식사하셨고 수고한다며 병동 간호사들에게 피자를 여러 판 돌리셨다. 그리고선 덜컥 세상을 떠나셨다. 수첩에 퇴원하리라 동그라미로 표시해 두었던 날이었다.


장례는 간소했다. 아내와 처가 식구들이 번잡한 격식을 원치 않았다. 내가 발인 예배를 이끌고 처외삼촌께서 가족을 대표하여 아침 일찍 함께해 주신 지인들께 고맙다는 인사말을 전하셨다. 아버님과 가까웠던 친구분들이 서울 근교의 장지까지 함께해주셨다. 단풍에 가을 햇살이 부서지는 아름다운 날이었다. 그날 찍은 사진 속 얼굴들은 담담하고 평화로웠다.


몇 달이 정신없이 흘렀다. 정리할 것들이 많았다. 사시던 집을 줄여 장모님 혼자 사실 집도 찾아야 했다. 아내와 처남은 앓는 소리 없이 하나씩 일을 해나갔다. 제일 큰 걱정은 오랜 반려를 잃은 장모님의 흐린 눈빛이었다. 뭔가 변화가 필요했다.


아버님 없이 맞는 첫 연말, 우리 가족은 장모님을 모시고 며칠간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다. 평소 집 떠나기를 반기지 않는 장모님에게 이런 여행은 오랜만이었다. 4박 5일간을 그저 느긋하게 쉬었다. 먹고 자고, 자고 먹었다. 오래전부터 드나들던 단골식당에 가고, 풍광 근사한 호텔 레스토랑에도 갔다. 근처 시장에서 고기와 생선을 듬뿍 사다가 숙소에서 요리해 먹었다. 깔깔거리며 뒹구는 아이들의 모습이 우리는 살아 있다고, 다시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