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5. 졸업 후
... 졸업 전시, 그리고 졸업 축하해.
여기에 이르기까지 최선을 다해줘서 고맙고, 포기하지 않아 줘서 고마워.
네 미래를 응원해, 영원히...
졸업 전시를 축하하고, 스스로의 미래를 응원하던 힘찼던 나로부터... 벌써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드디어 현재 시점으로 온 것이다. 미대 졸업생이 된 지금, 희망차게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응원하던 그 이후의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어쩌면 그다지 달가운 이야기는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비극적인 이야기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이다.
집과 같았던 실기실아, 안녕
6일의 짧다면 짧은 졸업 전시가 끝나고, 학기 또한 마무리되었다. 이젠 정말 학교에서 나를 붙잡을 것이 하나나 없었다.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은 '내 자리'였기에, 너저분하게 쌓아두었던 짐들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짐을 정리하면서 그 짐에 담긴 추억들도 새록새록 떠올랐다.
처음 유화물감을 사용해 봤던 1학년 때, 지독한 테레핀 냄새에 깜짝 놀랐었는데.. 최근에 산 테레핀을 아직도 다 못썼네. 집에다 어떻게 보관해야 하지?
결국 비싼 올드 홀랜드 물감은 못 샀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은 다른 비싼 물감으로 통 크게 샀었는데.. 그때 야금야금 아껴 쓰면서도 발리는 색상이 너무 좋아 기뻤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그 물감을 졸업 작품 때 요긴하게 써먹었다, 그치?
남는 아사 천은 에스키스 할 때 사용해 보겠다고 잘 모아뒀었네. 이렇게나 많이 모아놨었구나.
책상 위에 엎어져서라도 자려고 집에서 쿠션 가져온 것좀 봐. 그땐 머리에 뭘 대야 잘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쿠션 없이도 머리만 바닥에 닿으면 잘 잤었지. 심지어 실기실 불이 켜져 있어도 잘 잤었는데.
나도 모르게 짐을 정리하며 피식 웃었다. 그렇게 추억들이 하나둘씩 내 안에 정리되어 갔다. 동시에 마음이 먹먹해졌다. 정말 사소한 일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도 돌이켜보면 추억이었구나, 그때만 누릴 수 있는 평온한 기억이었구나. '졸업생'이 되자 미대에서의 추억이 아리게 다가왔고, 이젠 내가 당연히 누렸던 일상을 경험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게 실감되었다. 오손도손 동기들과 모여서 그림을 그리던 실기실의 공간, 대체로 날카로웠지만 때로는 따뜻한 교수님의 조언과 같은 그 모든 일상이... '졸업생'의 삶은 '미대생'의 삶과는 다를 것이다.
생각보다 4년 간 학교에 둔 내 짐은 많지 않았다.
양손에 들 수 있을 정도로 추린 다음, 짐을 짊어매고 터덜터덜 학교 밖을 향해 걸어갔다.
총 400호나 되는 졸업 작품은 어떻게 할 건데?
미대에서의 추억에 젖어있을 때 즈음, 그 분위기를 깨는 것을 조심스러워하며 엄마가 물으셨다.
'.. 근데 이렇게 큰 작품을 집에 둘 수 있나?'
아뿔싸. 그렇네?
그건 정말 생각도 해보지 않은 현실적인 부분이었고, 가장 먼저 처했던 어려움이었다. 4학년 2학기에 그렸던 졸업 작품은 총 400호로, 100호 캔버스가 4개나 되었다. 몇 개는 집 벽에 걸어둘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 모든 작품을 집에 보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슬프게도 이미 집에는 그동안 그려왔던 작품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그렇게 졸업 전시가 끝나자마자 작품을 어떻게 처리할 건지의 문제에 봉착했다. 결국 오랜 고민 끝에 가장 아낀 2개의 작품은 집에 보관하는 것으로 하고, 남은 2개는 최근 개업한 친척의 가게에 선물로 드리기로 했다. 집에 쌓아두느니 가게에 걸어서 보관하면 그래도 나름 전시가 계속되는 거니까... 그런 마음으로 졸업 작품들을 떠나보냈다. 새로운 그곳에서도 사랑받기를 바라며.
이미 가구로 가득 찬 내 방이었으나, 그럼에도 어떻게든 공간을 내서 벽에 졸업 작품 하나를 걸었다. 내 방에 놓인 졸업 작품은 400호 중 단 100호였음에도, 그 만으로도 내 방의 한 벽면을 가득 채웠다. 방에서 지내는 어느 순간이든 내 작품은 그 존재감을 발산했다. 책상에서 책을 읽든,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보든, 피아노를 치든 간에 졸업 작품은 항상 내 시야에 걸쳐져 있었다.
미대를 졸업하고 시간이 점차 흐르는 게 느껴졌고, 어느 날 대단한 이유 없이 졸업 작품을 문득 바라보았다.
나는 계속해서 달라지겠지. 그리고 내가 처한 삶의 모습들도 계속해서 변화할 거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대에 입학해서 적응해 나가고, 그리고 미대를 졸업하게 된 것처럼.
그럼에도 졸업 작품은 이 모습 그대로 내 방에 있겠지.
그 어떤 변화도 없이,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소설처럼.
별거 아닌 그 사실이 대단한 것마냥 느껴진다. 이제 학교를 떠났고 미대 전공자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가 모호하지만, 졸업 작품엔 미대에서 경험하고 배운 나의 감정, 생각이 모두 담겨 있다. 그리고 한 때 사람들의 시선을 받던 작품이 내 방에 남아, 변함없이 이후의 내 일상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마음의 위안을 주었다. 또다시 깨지고, 다치고, 아파하는 과정을 겪으며 나는 변화를 맞이하겠지만, 그럼에도 때때로 졸업 작품이 과거로 도망칠 수 있는 창구가 되어 주기를. 잠시나마 마음이 머물 수 있는 추억이 되어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