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6. 졸업 후
"있잖아,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수년이 지난 어느 날, 팀장님이 나를 조심스레 불렀다. 일을 잘못한 걸까 싶어 당황해하며 무슨 일이세요? 하고 다가가자, 팀장님은 난처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게.. 이제 내 딸이 곧 고등학교에 입학하는데 미대에 가고 싶다고 해서. 미대 나왔지? 여러 가지 좀 물어보려고 하는데 시간 좀 내줘."
"네? 미대요?"
미대를 졸업한 뒤, 복수전공을 살려 전혀 다른 진로로 나아갔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받을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미대에 대해 완전히 잊고 살았다가 그제야 묵혀놓은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듯했다. 미대를 벗어나도, 미대와의 연은 계속되는구나 싶어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졸업한 지 꽤 되긴 했지만.. 어떤 게 궁금하세요?"
미대에 입학하려면 내신이 어느 정도로 중요한지, 학원 선생님이 수학은 미대 입학에 있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인지, 수시는 몇 개 넣어야 하는지... 기억에 의존하여 하나하나 답을 하면서 새삼스레 추억에 휩싸였다. 맞아.. 그랬었지. 정말 대학에 가는 게 쉽지 않았네.
"그리고 말이야 이건 내 걱정이긴 한데... 애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긴 하는데, 그것만 믿고 대학까지 밀어줘도 될지 모르겠네. 어떻게 생각해?"
좋아한다라, 그 질문을 듣자 아주 오래된 기억 속 묻혀 있던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의 미소와 목소리가 떠올랐다. '... 네가 좋아하고, 잘 그리면 됐지. 뭐 다른 조건이 필요해?'
그 답이 아직까지 유효할까? 하지만 그러길 바라며 답했다.
"...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면 그걸로 반은 온 거예요. 좋아한다니 다행이네요."
전직 '미대생'을 따라다니는 말들
"우와, 미대 출신이었어요? 그렇게 들으니까 달리 보이네."
"꾸미는 건 네가 해봐! 너 미대 나왔잖아."
"손 푸는 겸 나 그려줄 수 있어? 너한텐 그다지 어렵지 않잖아."
"시간 될 때 그림 그리는 것 좀 알려줘."
진로가 전혀 달라져도 '미대생'의 칭호는 나와 쭉 함께했다. 잊고 지내다가도 불쑥불쑥 미대가 튀어나왔다. 때론 잘 숨겨져 있다가도 디자인을 해야 하거나, 심지어는 사무실을 리모델링해야 할 때도 '미대생이었지! 미대생의 미적 감각으로 봤을 때 뭐가 낫겠어?'와 같은 맥락에서 불쑥 등장하곤 했다. 미대생을 따라다니는 수많은 말들이 존재하지만, 대부분은 그림 그리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말들이라 속상하기도 했다.
사람들에게 미대란 어떤 이미지인 걸까?
나의 입시과정, 미대에서의 생활을 묵묵히 지지하던 엄마는 어느 날 취미로 그림 그리는 것을 시작해보고 싶다고 하셨다. 갑작스러운 엄마의 취미 미술 소식에 당황했지만, 엄마는 개의치 않았다. 금세 미술 학원을 등록하셨고 꽃, 나무, 풍경과 같은 것들을 하나하나 그려가기 시작하셨다. 하지만 곁에서 지켜보면 그 과정은 거의 고행에 가까웠다. 열심히 그리다가도 마음에 안 들면 다 지워버리셨고, 색을 어떻게 칠해야 할지 몰라 가장 칠하고 싶은 부분부터 칠하다가 전체적인 그림의 균형을 깨뜨려 낭패를 보기도 하셨다. 즐기며 그려나간다기보단, 아무것도 모르겠는 흰 백지 위에 던져진 사람처럼 보였다. 취미로 그리는 건데 왜 저렇게 괴로워하면서 그리시지? 싶다가도 그 모습마저 나와 비슷해 보여 말을 말았다. 가끔씩 엄마는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에 처할 때, 퇴근한 나에게 SOS를 보내셨다. '전직 미대생아, 도와줘'. 그럼 그 기회에 오랜만에 붓을 잡아보는 내 곁에서, 일종의 푸념을 하며 빠르게 움직이는 내 손을 바라보셨다.
"그림 그리는 게 이렇게 어려운 건지 몰랐어."
엄마의 말에 까르르 웃었다. 어때, 이제 내가 좀 달라 보이나 보지? 하면서 농담을 주고받고 계속 그림을 수정해 나갔다. 여기선 빛을 더 살려야 해, 주제가 되는 것부터 그려야 전반적인 균형을 잡는 게 쉬워... 그러한 설명들을 들으며 엄마는 또 묵묵히 그림 그리는 내 뒤편에 서있었다. 그러다가 잠시간 침묵의 시간이 흐를 때, 엄마는 툭하고 마음속의 말을 내뱉었다.
"네가 부러워. 그리고 싶은 걸 다 그릴 수 있잖아."
그 말이 나의 마음에도 남았다. 별 것 아닌 그 말이 내가 가진 것을 다르게 볼 수 있게 해 줬다.
그 마음으로 내 미래를 지지해 줬구나, 엄마.
생각해 보니 그렇네. 난 그리고 싶은 걸 그릴 수 있는 사람이었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 미술을 등진 걸까?
미대 졸업 후 미술을 진로로 삼지 않겠다고 마음먹었고, 거기엔 큰 결심이 필요하진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아주 오랜 기간 그림을 그려왔는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그 물음에 대해선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괜찮나, 괜찮지 않나로 대답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그냥 4학년이 되고, 졸업 전시를 위한 큰 작품들을 준비하면서 어느 순간 알아차렸을 뿐이다. 어쩌면 이 작품이 나에겐 마지막 작품일 수도 있겠다고...
안정적인 바를 추구하는 한편, 작가는 안정적인 수입이 없을 것이라는 나의 선입견 탓이었을까?
그리고자 하는 바를 표현하는 것보단 여전히 재료비를 더 신경 쓰는 면 때문이었을까?
그림을 통해 무언가를 증명해 내는 삶이 지쳤던 걸까?
작가로 나아가지 않은 이유를 나조차도 설명하기가 어렵다. 많은 선배, 동기들이 미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유학을 갔지만, 그들과 전혀 다른 길을 걸으면서도 나는 딱히 뒤돌아보지 않았다. 서로 길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하며 나에게 주어진 길을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개인전을 하는 선배들, 그리고자 하는 바를 계속 밀고 나가는 동기들을 보자 어쩐지 스스로가 멈춰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분명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게 맞는데, 동시에 무언가 멈춰져 있는 듯한 기이한 느낌이다. 선배들, 동기들의 작품엔 그림을 그리는 스스로가 담겨있고, 그리고자 하는 바를 그려나가고 있다. 내가 만약 작가로서의 진로를 이어갔다면, 나는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까?
난 나아가고 있는 걸까, 미술을 등진 채로 멈춰져 있는 걸까.
오랜만에 붓을 잡아도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