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정말 최근에 있었던 일이다.
2024년에서 2025년으로 바뀌는 그즈음,
새해 카운트 다운을 준비하고 있던 나는 갑작스레 과대 언니로부터 카톡을 받았다.
OO아! 그동안 잘 지냈어? 오랜만이야, 새해 복 많이 받아!!
같은 과 애들 몇 명해서 만날까 하는데, 올 생각 있는지 물어보려고.
졸전 같이 한 친구들 많이 오면 재밌을 것 같아서 히히
마침 '미대생 존기'를 쓰며 미대 생활을 돌이켜보고 있던 나에게 과대 언니의 카톡은 뭐랄까, 새해 선물처럼 느껴졌다. 졸업한 지 벌써 몇 년이 지났고, 다른 진로로 나아가느라 미대 동기들을 자주 만나진 못했는데...
그러게, 정말 다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언니도 새해 복 많이 받아.
졸전 정말 추억이다... 나 가능할 것 같아! 오랜만에 보자 :)
답장을 보내며 너무 오랜만이라 걱정되는 한편, 마음이 설레었다. 20대 초였던 이들이 모두가 사회인이 되었겠지. 꿈을 꾸며 그림을 그리던 동기들은, 그들이 바라던 멋진 어른이 되었을까?
자신만의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거야
새해에 모인 이 미대 모임은 '몇 명'이라고 했지만 거의 20명 정도 모인, 아주 대규모의 모임이었다. 연락을 하고 지낸 동기도 있었지만, 졸업한 뒤 처음 보는 동기들도 있어 쭈뼛거리며 들어갔다. 하지만 나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다들 하나도 변하지 않은 얼굴로 나를 반겨주었다. 반가운 얼굴들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대학교 1학년이 되어 MT에 간 것만 같았다. 너무 많은 인원(동기가 대량 40~50명 정도 된다)에 서로 안면을 트는 것만 해도 시간이 많이 걸렸던 그때의 시절이 떠올랐다. 그 덕택인지, 얘기를 하다 보니 금세 서로가 익숙해졌다. 물론 대화 내용이 그때에 비해 결혼, 직장 생활 등으로 한층 성숙해졌다만. 한편으로, 미대생 시절보다 더 직설적으로 교수님 욕(?)을 하기도 하고, 학교 걱정을 하기도 하고, 졸업 전시 때의 썰을 나누며 아이처럼 웃기도 했다. 한창 웃으며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즐겁게 웃고 있는 동기들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 근데 말야, 우린 결국엔 자신에게 맞는 삶을 살고 있네."
20명가량을 모아놓고 보니, 그제야 보였다. 20대 때 유독 자신의 마음을 가렵게 했던 곳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표현하고 싶은 게 많았던 동기는 최근 대학원을 졸업한 뒤 전시 준비 때문에 여념이 없었고, 졸업 후 순수 미술 전공으로 뭘 해먹고 살지 걱정되었던 동기는 디자인 계열로 취업을 했다. 아이디어를 기획하는 게 좋았던 동기는 마케팅 부서로 취직을 했고,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었던 동기는 사업가가 되었다.
한 사람마다 하나의 사연씩, 그들은 다들 자신에게 맞는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어느 방향이 든 간에, 그 뿌리엔 모두가 미대생이었다는 마음을 지닌 채로.
살아남은 모든 미대생들에게
사실상 '미대생 존기'를 쓰기 시작했던 계기는 episode 16인 '졸업한 뒤 어떻게 지내요?'였다. 어쩌다 보니 팀장님 딸의 미대 진학을 상담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까먹고 있었던 미대생으로서의 경험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맞다, 나 미대생이었지. 미대 진학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구나, 그리고 미대 생활이 어떤지 궁금해하는구나... 그럼 미대 졸업생으로서 미대생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써보자는 마음으로 가볍게 '미대생 존기'를 쓰기 시작했다.
'미대생 존기'를 쓰면서 때론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기억나질 않아 일기장을 뒤져보기도 하고, 예전에 교수님의 피드백을 적어놓은 수첩을 꺼내보기도 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한 주에 하나의 에피소드씩 적으며 느꼈던 건, 스스로를 질책하며 고통스러워했던 기억과는 달리 실질적으로는 미대 생활을 꽤나 열심히 했었다는 것이다. 충분히 잘해가고 있었는데도 왜 스스로를 고운 눈으로 보는 게 어려웠을까? 그리고 미술에 대해 순수하게 고민할 수 있던 그 시기의 소중함을, 그땐 왜 몰랐을까? 다 지나오면 항상 아쉬운가보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일기처럼, 이제 '미대생 존기'의 막을 내리고자 한다.
마무리하기 전, 입시미술을 거쳐 미대를 졸업한 모든 미대생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졸업까지 잘 버텨줘서 고맙고,
이젠 '잘 그리는 것', '그려야 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기만 해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그래도 잘 그려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들 땐,
가볍게 '뭐 어때?'하고 답해버리고 그리는 즐거움에 집중하기를.
흰 종이 위에서 무수히 고민하던 많은 시간들과, 여러 번의 덧칠이 모여 완성해 나가는 작품처럼
우리의 삶도 그와 비슷하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미대를 졸업한 이후에 전공을 살릴 수도, 안 살릴 수도 있지만 뭐 어때.
그것과 관계없이 우리는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왔기 때문에, 그 힘으로 어떤 삶이든 살아갈 수 있다고.
자신만의 삶의 방향을 향해 나아가기를,
우리 모두가 그래온 것처럼.
그동안 '미대생 존기'를 읽어주시고,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