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episode 17. 졸업 후

by 상희

일이 너무 많아 고되고 지친 하루였다. 끊임없이 전화를 받고, 예산을 수정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심지어 길고 긴 퇴근길에 더욱 지쳐버려 집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져 누웠다.


"하... 이놈의 회사"


곡소리가 절로 나온다. 한숨을 뱉으며, 내일 출근을 위해 몇 시에 자야 하는지 계산했다. 아침 7시에 일어나야 하니 적어도 새벽 1시에는 자야 6시간은 잘 수 있겠네... 씻고 저녁 먹으면 9시 즈음되니까 그럼 내게 남은 자유시간은 4시간이었다.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은 하루여서 자기 전 힐링이 필요했다. 다음 날이 오기 전에 나만의 시간을 누려야 내일의 출근을 견딜 수 있었다. 남은 시간에 뭘 할까 고민하다가 갑자기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다. 그런 충동은 종종 아무렇지도 않게 찾아오곤 한다. 고된 몸을 이끌어 책상 앞에 앉았고, 집에 굴러다니는 종이 하나를 펼쳐두곤 연필을 집었다. 오랜만에 그림 그릴 생각을 하니 마음이 들떴다.

무수히 많은 가능성을 가진 채 내 앞에 놓인 새하얀 종이,

그리고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연필을 든 나.


"... 근데 뭘 그려야 하지?"


그릴 마음이 가득했는데도 한 20분은 연필만 든 채 멍하니 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무엇'을 그리느냐에서 막혀버렸다. '입시'가 빠지고, '학교'가 빠진 뒤 이젠 정말 그림과 나밖에 남지 않았는데...

오히려 둘의 관계가 소원해져 버렸다.



뭐든 그릴 수 있지만, 뭐든 그릴 수 없는 사람


결국 빈 종이를 그대로 남겨두고 나서야, 내가 미대를 졸업한 뒤 그림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물론 엄마의 그림을 봐주느라 자주 붓을 잡긴 했다만).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충동이 든 적은 있지만, '귀찮으니까 다음에'와 같은 식으로 행동에 잘 옮기지 않았던 것이다. 본격적으로 그려보려고 하니 그릴 것이 없다. 미술과 내가 이렇게 뚝 끊겨버릴 수 있는 관계였나? 5살 때부터 맺어왔던 관계가, 전공으로까지 이어왔던 이 끈질긴 관계가! 이사해서 서로 사는 곳이 멀어졌지만 그럼에도 단짝 친구라고 믿었던 친구와 오랜만에 만났는데, 서로 달라진 모습에 당황하여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느낌이었다.


어릴 땐 정말 자유롭게 그림을 그렸었다. 좋아하는 캐릭터(어릴 때 '꼬마 마법사 레미'를 좋아했다)의 여러 버전을 그리며 즐거워했고, 가족 여행을 갔을 때 보았던 멋진 풍경을 다소 역동적(?)으로 그리기도 했다. 종이만 보면 정말 별 고민 없이 바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는데, 어째 배우면 배울수록 그리고 자유로우면 자유로워질수록 종이 앞에서 주저하게 된다. 연필, 목탄, 색연필, 수채화, 유화, 심지어 먹까지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를 익혔고, 정물의 자연스러움을 어떻게 그리는지, 공장에서 찍어낸 사물들의 형태를 어떻게 틀려 보이지 않게 그려내는지, 사람의 골격이 어떻게 생겼고 이를 자연스럽게 그려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아는데, 어떻게 빈 종이일 수 있냔 말이야. 즐기며 그리기보단, 아무것도 모르겠는 흰 백지 위에 던져진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취미로 그리는 건데 왜 저렇게 괴로워하시지?' 내가 엄마를 보며 던졌던 질문이 그대로 나에게 돌아와 꽂혔다. 너 힐링하려고 종이 펼친 거잖아, 아냐? 그림 그리면서 즐거워하려고 했던 거잖아.


'못 그려도 되고, 뭘 표현하지 않아도 되고, 작업 세계가 없어도 되고, 정말 아무거나 그려도 된다니까?

이거 그려서 누구 보여줄 것도 아니야. 그냥 막 그려도 된다고. 너 즐거우라고 그리는 거라고!'


입시와 학교를 벗어났음에도, 새하얀 종이 앞에 서면 무언가를 증명해야 한다는 마음이 드는 걸까? 현재까지 미술과 내가 쌓아온 관계는 그런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감정으로 시작했던 순진한 마음이 갈 길을 잃었다. 미대에 다닐 땐 결과로 보여줘야 했기 때문에 더 얽매여있었다면, 지금은 '그려야 하는 그림'에서 벗어나면 어떻게 되는 지를 전혀 상상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붓을 놓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그리워졌다. 그래서 가족들이 모두 잠든 새벽에 시간이 될 때마다 주섬주섬 미술용품들을 챙겨, 책상 앞에 쭉 깔아놓고 나에게 무엇이든 그려도 된다고 읊조렸다. 이제 내가 그리는 그림엔 그 어떠한 평가도 없이 자유로워졌지만 그럼에도, 심지어 진로까지 달라진 나는 그리는 것을 망설인다.


그릴 게 없고,

그리고 싶은 것도 없고,

그리더라도 보여줄 사람도 없지만,

그럼에도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렇다면 어떤 그림을 그릴래?



그 어떤 틀도 없을 때, 무엇을 그릴래?


그림을 그리기 위해선 '즐거움'이 필요했다. 늘 목을 조이고 있는 부담감을 내려놓고(난 정말 불안감이 높은 사람이라는 것을 지금껏 '미대생 존기'를 쓰면서 느꼈다), 그저 그림으로써의 그림을 그려나가야 했다. 그림은 그저 그림이며, 무엇이든 그려도 괜찮다. 어린아이처럼 상상의 나래를 펼쳐도 좋고, 이미 다 자란 어른처럼 눈에 보이는 세계를 그려나가도 좋고. 꼭 연필로 그리지 않아도 괜찮다. 붓을 써도 되고, 하물며 손가락으로 막 문질러가며 그림을 그려도 된다. 학원 선생님이 봤을 때 형태가 엉망이라고 하는 그림을 그려도 괜찮고, 교수님이 볼 때 이 학생은 정말 작가로서 가망이 없다고 할 그림을 그려도 괜찮다.


"정말 그래도 괜찮아."


또다시 틀에 부딪히면, 이를 깨나 가야 한다.

그림에 대한 즐거움에서 시작했지만 입시를 경험하며 내 안에 틀을 만들었고, 미대에 입학하며 다시 틀을 깨려 했지만 결과를 증명해야 한다는 내 안의 틀에 다시 갇혔다. 졸업하고 나아가고 있는 지금, 나는 또다시 내가 만든 틀, 한계, 제약에 부딪혔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그림을 그리며 즐겁고 싶기 때문에, 나는 또다시 마주한 이 틀을 깨 나가야 한다. 무엇이든 그리고 싶은 것을 즐겁게 그릴 수 있도록... 그리고 그게 가능하다고 믿는다. 지금껏 여러 틀을 깨온 나였기에.


그 어떤 틀도, 한계도, 제약도 없이 미술과 너만 있다면

넌 어떤 그림을 그릴래?


16400117_v695batch3-sasi-17-simpleframe.jpg 여러분의 빈 종이엔 어떤 그림이 그려지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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