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어릴 적부터 가장 좋아하는 색은 회색이었다.
아주 밝지도, 아주 어둡지도 않은 그 미묘한 경계에 놓인 색이 좋았다. 때로는 환한 흰색과도 잘 어울리고, 어쩔 땐 우중충한 검은색과 더 가까워 보이기도 한. 회색은 쉽게 정의 내리기 어렵다는 그 불분명함으로 늘 나를 매료시켰다.
그리고 지금, 20대와 30대의 미묘한 경계 지점에 서 있는 한 명의 '회색 인간'으로서,
나는 어둠 속에 앉아 새해 카운트다운쇼를 바라보고 있다. TV속 사람들은 저마다의 소망과 기대를 품은 채 곧 터져 오를 불꽃놀이를 기다린다.
"자, 그럼 카운트다운 시작합니다!"
10부터 시작한 외침은 하나둘 숫자를 지워갔다. 나는 숨을 죽이고 화면 속에 명멸하는 숫자들을 응시했다. 기어코 숫자가 '3'까지 내려앉았을 때, 그제야 나는 숫자를 함께 마음속으로 세었다.
3, 2, 1. 그리고, Happy new year.
잠시 눈을 감고 스스로에게 새해의 복을 빌었다.
미묘한 경계에서 한 발자국 걸어 나가는 미래가 평온하기를.
지독히 변덕스러운 삶의 가운데에서도 기어이 중심을 잡기를.
언젠가는 바뀔 줄 알았으면서도, 영원히 나를 따라다닐 것만 같던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자 감회가 새롭다. 이곳이 흰색인지 검은색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으나, 다만 분명한 것은 나라는 회색에 이전보다 짙어진 명암이 생겼다는 사실이다.
미묘한 경계를 조금 넘어선 여기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혼란스러웠던 나의 회색빛 기록을 하나씩 펼쳐보려 한다.
켜켜이 접혀 주름이 진 나의 스물, 그리고 아홉 해의 무늬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