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세상이 우릴 속일지라도
항상 긴장되던 순간이 있다. 내 이름이 호명되고, 성적표를 받으러 교단 앞으로 나가는 그 짧은 걸음의 시간.
아이들은 이름이 불릴 때마다 한 명씩 나아가 자신의 숫자가 적힌 종이를 받아왔다. 종이를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는 아이, 찰나의 미소를 머금는 아이. 저마다의 표정으로 자신의 위치를 가늠하는 그들을 바라보며, 나는 교단 앞으로 걸어간다.
'나는 지금 저들 중 어디쯤 서 있을까.'
한 반을 가득 채운 아이들을 머릿속으로 일렬을 세워본다. 그리고 그 무리의 한가운데에 나를 배치시킨다. 나는 이 가운데보다 더 앞으로 나아가게 될까? 아니면... 쿵쾅거리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선생님이 건네는 성적표를 받아 든다. 국어, 수학, 사회, 과학... 그리고 숫자로만 표기된 나에 관한 기록.
종이 한 장 위에 납작하게 눌려진 나.
'그래, 그랬구나. 나는...'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라는 존재의 선명함보다, 타인과 나 사이의 거리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게 된 것이. 내가 누구인지보다 내가 몇 번째인지가 더 중요했던, 지독한 상대평가의 세계에 발을 들인 순간이었다.
철없던 10대부터 20대가 되도록 줄곧 앓아온 것은, '상대평가의 습관'이었다. 교실 문을 나서면, 대학에 입학하고 나면 이 지독한 순위 싸움도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웬걸. 20대의 세상은 더 정교하고 다정한 얼굴로 나를 채점하기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시장에 뛰어들면, 그 다정함이 생계를 쥐고 흔드는 폭력으로 변한다. 사람을 채점하기 위한 항목들은 이미 견고하게 정해져 있고 더 치밀해졌다.
나는 또다시 이력서라는 종이 위로 납작하게 엎드려야 했다.
'어느 대학인가요?'
'학점은 얼마나 되죠?'
'인턴 경험은?'
'토익 점수는?'
'취득한 자격증은?'
'남들 다 하는 대외 활동은 했나요?'
그만, 그만 좀 물어보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낮은 점수를 받고 싶진 않았기에, 더 높은 숫자를 얻어내려 부단히 애썼다. 늘 옆 레인에서 뛰는 사람의 등 번호를 훔쳐보며 나의 속도를 검열했다. 저만치 앞서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숨을 헐떡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다리가 아파 속도를 늦추게 되었을 때,
그제야 내가 달리고 있던 길을 제대로 보게 된 20대의 끝자락에서야 비로소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
우리의 삶은 같은 트랙 위를 달리는 경주가 아니라, 각자 다른 길을 향해 가는 탐험이었다는 것을.
애초에 비교 대상이 없는, 지독히도 고독하고 자유로운 '절대평가'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는 모두 같은 곳을 향해 달리고 있는 게 아니었다. 어쩌다 출발점은 같았을지 모르나, 목적지가 저마다 다르다는 걸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을 뿐이다. 누군가의 길에는 일찍이 비탈길이 나타나고, 누군가의 앞에는 깎아지른 절벽이나 평온한 평지가 뒤늦게 찾아오기도 한다. 그렇기에 남들보다 속도가 늦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슬퍼하지 않았으면 한다.
각자의 계절이 다르고 지형이 다르기에, 우리가 겪는 고난과 평화의 시기 또한 결코 같을 수 없다. 그러니 이제는 꼭 한가운데에 서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어차피, '가운데'라는 기준조차 존재하지 않는 각자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을 뿐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