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세상이 우릴 속일지라도
최초의, 최연소, 국내 초연. 그는 틀림없이 욕망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걸어봤겠지? 불현듯 그녀는 자신이 지금껏 누구에게도 떼쓰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일찍 철이 든 척했지만 그녀의 삶은 그저 거대한 체념에 불과했음을.
- 백수린, <여름의 빌라> 중-
장래희망을 적는 란 앞에서 단 한 번도 주춤거린 적이 없었다. 어린 나는 거침없이 그 칸을 채워 나갔다.
'화가'
아는 화가라곤 반고흐나 피카소뿐이었지만, 그때의 나는 그들의 이름 곁에 내 이름이 놓이는 미래를 의심치 않았다.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근사한 작품들을 만들어나갈 거라고 다짐했다. 주위 사람들도 내가 어떤 꽃을 피울 씨앗인지도 모른 채, 흙을 뚫고 올라온 연약한 새싹만을 보고도 내 꿈을 응원했다. '너무 잘 그린다, 멋진 화가가 되겠다...'. 그리고 부모님 역시도.
나를 따라, 부모님의 자녀 장래희망 칸에도 같은 단어가 놓였다.
'화가'
하지만 성인이 된 나는, 그 시절 젊었던 부모님께 물어보고 싶다.
부모님은 내가 어디까지 나아가기를 기대했는지.
아니, 부모님은 내 꿈의 '어느 지점'까지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지.
눈앞에 그저 해맑게 웃으며 밝은 미래를 기약하는 내가, 그들에겐 어떤 씨앗으로 보였는지.
성인이 된 내가... 어떤 모습이기를 기대하며 그 칸을 채웠을까?
철이 너무 일찍 들었다.
돌이켜보면 그렇게 쉽게 그림에 대한 꿈을 놓아버릴 수 있었던 이유도 그래서였던 것 같다. 개인의 위기든, 가정의 위기든, 나는 삶에 균열이 생길 때마다 가장 먼저 그림으로 향하는 미래를 접었다. 좋은 물감은 비쌌고, 좋은 캔버스도 비쌌다. 더 좋은 것을 꿈꿀수록 나는 색깔보다 '가격'을 먼저 배웠다.
"미술은 돈 많이 들지 않았어요?"
생각보단 미대 가는 것까지는 돈이 많이 들지 않는다고,
그렇게 말하는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럼 미대 나오면 돈은 잘 벌 수 있어?"
기어코 질문이 나에게까지 왔을 때, 나는 그제야 내가 꾸는 꿈엔 '금액'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냥 화가가 되고 싶다는 어린 시절 순수한 마음만으로는 갈 수 없는 길이었다. 세상에는 투자의 개념이 있고, 자본을 투입했다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따라와야 한다는 무언의 규칙이 있었다. 부모님도 내게 바라는 결과가 있었을까?
돈을 더 쓸 수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더 쓰고 싶지 않았다. 세상의 이치가 내가 쓴 돈만큼의 결과를 증명해야 한다고 말하는 거라면. 부모님은 내게 단 한 번도 그림을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지만, 나는 공기 중에 떠다니는 미묘한 분위기를 읽어냈다. 그리고 쉽게 누구에게도 논의하지 않고 단정했다.
내 꿈은 가성비가 떨어진다고.
그러니 내 손으로, 여기서 멈춰야 한다고.
누구에게도 떼쓰지 않고 결정해 온 지금,
스물아홉 해를 넘긴 성인이 되어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모든 것들은 '현실적인 선택'이었던 걸까, 아니면 그저 나의 '거대한 체념'이었던 걸까?
욕망하는 미래를 위해 목숨을 거는 대신 주위를 살피다 발을 멈춰버린 나는, 끝내 체념하지 않았다면 재어볼 수 있었을 꿈에 대한 무게를 잃었다. 끝까지 가보지 않았기에, 나는 알 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린 것이다. 내가 원래 그 정도밖에 자라날 수 없었던 씨앗이었던 건지, 혹은 더 높이 자라나기도 전에 스스로 꺾어버린 꽃이었는지를.
그게 꿈을 두고 온 '거대한 체념'의 무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