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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킹맘 놀부며느리 Apr 25. 2022

매일이 불안한 나에게 보내는 글

작별인사, 불안과 작별하다

매일이 불안했던 나에게     


 나는 매일이 불안했다. 분명 열심히 살고 있는데, 멈추어 쉬어본적이 없는데, 열심히 살아온 시간치곤 너무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취업대신 영업을 선택했고 쉼 없이 달려왔지만 아이 둘 낳고 그 일도 멈추게 되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사람’ 때문이었다. 돈도 싫고, 명예도 싫고 그냥 사람들과 부대끼는 그 상황들이 싫었다. 워낙 결정과 행동이 빠른 나였기에 마음이 불안했던 나에게 극단적인 선택권을 주었다. 그렇게 나는 단 3일간의 고민을 끝으로 일을 그만두었다. 가만히 있어도 남편 월급 이상 나오는 칠백만원짜리 파이프라인을 잘라냈다. 무려 7년간 쉼 없이 달려온 나의 일을 멈추는 것은 나에게도 주변 사람에게도 나름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과거 내가 했던 일은 한 단계씩 성취하는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여성들에게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시장이 무너지고 세상이 변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우리가 ‘비전’이라 제시하는 것들이 막을 내릴 지도 모른다는 부담감에 강단에 설수도 없었고, 회사에서 주는 여러 인정들에 거부 반응이 생겨났다. 급기야 집중과 몰입의 결과로 회사에서 받았던 차량도 돌려보내고 나는 누군가의 리더가 아닌 혼자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      


 마음이 아프고, 괴롭고, 힘든 시간을 지나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또다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둘째를 출산한 직후였는데, 산후조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돌파구를 찾겠다고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거의 7년이 넘는 시간동안 같은 생각, 같은 마음으로 일해 온 내가 무언가 새로운 생각을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웠다. 나는 막상 일을 멈추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일을 취미처럼, 놀이처럼 할 수 있도록 해준 모든 것이 완벽했던 그 회사를 떠난 다음, 여러 화장품 관련 회사에서 러브콜이 오기 시작했다. 때로는 함께 일을 시작해 보기도 하고, 거절도 해보았지만 선택에는 늘 어려움이 따랐다. 제품이 좋으면 회사가 별로고 회사가 좋으면 제품이 별로였다. 게다가 사람이 마음에 들면 그이상의 특별한, 끌리는 비전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시간을 보내다가 2년 만에 알게 되었다. ‘내가 꼭 화장품과 관련된 일을 할 필요는 없지 않나?’ 불연 듯 이런 생각이 스쳐갈 때 즈음, 나는 열심히 살아온 나의 20대가 너무 아깝게 느껴졌고, 아깝다고 생각할수록 다가온 30대의 내 모습이 별 볼일 없게 느껴졌다. 아이는 벌써 둘이나 낳았고, 몸은 몸대로 망가져 거울 속에 내 모습은 그냥 동네 아줌마 같았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열심히 살아온 나의 20대를 글로 기록하기로. 나의 이야기를 책으로 출간하고, 나의 이 실패와 경험들 그리고 깊은 생각들을 나와 비슷한 상황의 여성들에게 알리기로.

그것이 매일이 불안했던 나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 될 줄은 그때 정말 알지 못했다.


 아이 둘을 재우고 10시 30분부터 새벽 두 세시가 넘는 시간까지 글을 썼다. 꼭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는데, 막상 글로 표현하려고 하니 기억나지 않는 일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글을 쓸 때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어 정말 행복했다.


 ‘끌리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라’는 어느 책에서의 문구 덕분에 나는 익숙한 분위기의 세미나에 이끌려 수강료가 1000만원 씩이나 되는 책쓰기 수업을 수강하기로 결심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들을 어른이집에 보낸 다음 이후 케어는 부모님께 부탁드리고 4시간을 달려 수업에 갔다. 그리고 심야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하면 새벽 4시30분, 아이들이 일어나면 다시 하루를 함께 시작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내 삶에 다음 단계가 보이는 느낌이었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요즈음은 블로그에 작성한 글로 책을 출간할 수 있고, 작가가 되는 길이 여럿 있지만 당시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이 돈이면 내 인생이 엄청나게 바뀔 것이라 생각했고, 그 돈과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번째 책을 출간했다. 그 이후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분별력을 키울 수 있는 시간을 경험하게 되었다.


 2016년 첫 번째 책을 출간한 이후부터 나는 그 전의 삶에서 느꼈던 불안감을 수시로 느꼈다. 잘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나의 마음속에 늘 불안감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훈련된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나의 태도에 또다시 무엇인가 이루어야 한다는 목표지향적인 성격이 더해져 그 전보다 더 쉴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더 큰 것을 이루겠다는 마음으로 7년간 일하며 벌었던 돈으로 힘들게 매매했던 아파트를 급매하고 분당으로 이사를 가기로 결심했다.     

 34평짜리 집에서 벗어나 9평 방 한 칸 복층 오피스텔로 이사 갔을 때의 감정이란, 그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아이들은 자신의 방이 없어진 것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고, 남편은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나와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기 시작했다. 편안한 삶을 뒤로한 채 다음단계로의 도약을 꿈꾸었던 나는 가족들에게 ‘우리는 하나’라는 것을 핑계로 억지 적응을 강요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떠나는 우리 네 식구보다 그것을 지켜본 부모님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싶다.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나온 남편의 마음은 어땠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참 감사한 마음이 든다. 말리고 싶었을 것이고, 혼내고 싶었을 것인데 나의 선택을 믿고 지지해준 남편과 부모님들께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


 ‘나는 무엇이 그토록 불안했을까?’

 ‘왜 그렇게 가만히 있지 못했을까?’

 ‘무섭지 않았을까?’     

 새로운 도전하기 위해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 온 가족을 데리고 상경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누군가는 대단한 용기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결정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용감했다기 보단 ‘무지’했던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람을 잘 믿고, 아는 것이 없었기에 두려움이 없는 줄 알았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월이 한참 지나 그 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고, 나는 그 때 그 때 두려웠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어쨌든 나는 늘 불안했다. 그래서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했다. 심지어 그 무언가는 결코 쉽지 않은 것들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늘 불안했던 내가 있었기에 지금의 나도 있는 것이다. 불안속에서 했던 다양한 경험들이 분별력을 갖게 해주었고,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사람은 왜 경험을 해야 깨닫게 되고, 알게 되는 걸까싶지만, 나는 남들보다 조금 더 빠르게 많은 것들을 경험하게 해준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이 든다. 그리고 늘 끊임없이 도전하고 움직일 수 있게 키워준 부모님께도 감사하다. 혹시 왜 지나지 않고 알게 되는것은 하나도 없는 것일까 하는 마음이 드는가? 하지만 그것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경험 속에서 느끼는 매일의 불안감은 그 다음을 위한 준비의 시간이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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