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중간한 삶을 살기로 했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결과치는 미비하지만 할 만큼 한 것 같아요”
“아니요. 당신은 최선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직장생활을 할 당시 5년 차 즈음 기억이 난다. 새로 부임한 박 과장이 있었는데 유행어만큼이나 남발하는 말이 있었다. “이 보고서, 최선을 다한 건가?”, “이 매출치, 최선을 다한 게 맞아?”
항상 ‘최선’을 강조했다. 그 최선이라는 기준에 부합하지 못한 직원들은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기준에 자신을 끌어 맞추려 했다.
법에 명시된 기준도 아니었는데 실무를 보지 않는 박 과장의 모호한 기준에 맞춰 혼자 목표를 재설정해야 했다. 야근을 불사했고 최선의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업무 질량 보존의 법칙이 있는데도.. 오늘 야근을 하면 내일 일이 줄어들 거란 기대를 한 것일까.
반대로 이 ‘최선’은 최후의 변론을 뒷받침해주고 있음을 느끼고 살아간다. 어떤 도전에 실패를 하고 나면 “최선을 다했습니다”를 남발한다. “할 만큼은 했는데 (어쩌라고)”라는 항변이기도 하다. 최선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 팔 굽혀 펴기 50개를 한 것이 스스로의 기준에 부합한다면 최선을 다한 것이고, 200개가 기준이고 해냈다면 최선을 다한 것이다. 하지만 직장이나 사회에선 내려진 ‘최선’은 상대적이기 힘들다. 시험 합격선이 90점이라면 90점에 다다라야 최선을 다한 사람이 된다.
89점이든 60점이든 똑같이 불합격자가 되기 때문에 남들이 보기엔 똑같은 패배자가 된다. 그동안 최선을 다했던 과정은 눈에 보이지가 않기 때문이다.
누구의 잘못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노력까지 들춰서 “어, 그래. 자네 비록 89점으로 실패했지만 최선을 다한 거야”라고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누가 이런 말을 해주지 않는다고 마음이 무너질 필요는 없음을 점점 깨닫고 있다.
그저 스스로의 기준에 더 엄격하게 반응해야 함을 말이다. 내가 도전한 것들의 결과물이 나오지 않고 기대보다 떨어질 때 그때마다 부여잡고 나를 탓하기 바빴다. 더 많은 독자들과 교감을 나누고 싶어 최선을 다한 책을 쓰더라도 너무나 많은 변수에 의해 그러지 못할 확률이 더 높다. 그럼에도 모든 것이 내 탓인 양 자괴감에 빠져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시간을 점점 줄여나가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기준에 부합한다면 나한테 숨을 쉴 숨통을 트여주고 싶어서 말이다. 살아가는 데 있어 통제할 수 있는 변수가 있고 없는 변수가 존재하는 데 2가지 부여잡고 싶어 안달이 나다 보니 병이 생긴다. 놓아줄 필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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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도 아니고 포기도 아닌 어중간한 삶을 사는 이들을 위하여..